미륵선화 설화는 신라 진지왕 때 국선인 미륵선화에 관한 설화이다. 『삼국유사』 권3 「미륵선화 미시랑 진자사」에 실려 있는데 내용은 다음과 같다. 신라의 승려 진자가 미륵불이 화랑으로 나타나 주기를 빌었다. 웅천의 수원사에서 미륵선화를 만나 그를 대궐로 데리고 와서 화랑으로 삼았다. 미륵선화의 이름은 미시였는데 미시와 미력(미륵)은 서로 비슷하여 바꾸어 불렀다고 한다. 이 설화는 미륵에 관한 우리나라 최초 기록으로서 신라 미륵 사상의 독특한 면모를 보여준다. 또 신라 화랑도에는 화랑이 곧 미륵이라는 의식이 깔려있음을 알 수 있다.
영이설화(靈異說話)에 속하며, 『삼국유사』 권3 미륵선화 말시랑 진자사(彌勒仙花未尸郎眞慈師)에 실려 있다.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신라 진지왕 때 흥륜사(興輪寺)의 중 진자(眞慈)가 늘 미륵상 앞에서 미륵불이 화랑(花郎)으로 화현(化現 : 불보살이 중생을 교화하고 구제하려고 여러 가지 모습으로 변하여 세상에 나타남)해 주기를 빌었다. 또 자신이 미륵 화현의 화랑을 늘 가까이 모시고 지성으로 시중들 것을 발원하고 맹세하였는데, 그 생각이 날로 더욱 간절해졌다.
어떤 날 꿈에 중이 나타나 웅천(熊川 : 지금의 공주)의 수원사(水源寺)에 가면 미륵선화를 볼 수 있다고 하였다. 진자는 그 절을 찾아가는 열흘 동안 내내 한 걸음 뗄 때마다 절을 하였다. 절에 이르자 문밖에 있던 곱게 생긴 소년이 진자를 맞아 객실로 안내하였다.
진자는 소년에게 “그대는 나를 모르는 터에 어찌 이렇듯 은근하게 대접하는가?” 하고 물었다. 소년은 “나도 또한 서울 사람이라 스님이 멀리 오심을 보고 위로하고자 왔을 뿐입니다.”라 말하고 문밖으로 나가 자취가 묘연하였다.
진자는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절의 중에게 꿈 이야기와 여기에 오게 된 뜻을 말하였다. 그리고 잠시 아랫자리에 머무르면서 미륵선화를 기다리겠노라 하니 절의 중들이 명감(冥感 : 드러나지 않고 은밀하게 감응함)이 많은 천산(千山)에 가 보는 것이 좋겠다고 하였다.
진자가 산 밑에 이르렀을 때 산신령이 노인의 모습으로 나타나 이곳에 오게 된 까닭을 물었다. 진자가 미륵선화를 보러 왔음을 말하니, 노인은 “앞서 수원사 문밖에서 이미 미륵선화를 보았는데 다시 또 무엇을 보겠다고 하는가?”라고 하였다. 깜짝 놀란 진자는 급히 본사로 돌아왔다. 진지왕이 진자를 불러 “소년이 스스로 서울 사람이라고 하였다면 성인의 말에 거짓이 없을 터인즉 서울 성안을 찾아보는 것이 어떠한가?”라고 말하였다.
진자는 무리를 모아 민가를 두루 찾았다. 영묘사(靈妙寺) 동북쪽 길가에서 얼굴이 예쁜 소년을 보고, 진자는 놀라며 “이 분이 미륵선화이다.”라고 말하였다. 소년의 이름은 ‘미시(未尸)’로, 어려서 부모를 여의어 성은 모른다고 하였다. 소년을 가마에 태워 대궐로 들어가 왕에게 보이니, 왕이 그를 공경하고 사랑하여 화랑으로 삼았다.
소년은 화랑의 무리와 화목하게 지내고 예의와 풍교(風敎 : 교육이나 정치의 힘으로 풍습을 잘 교화하는 일)가 비상하여 풍류로 세상을 빛내다가 7년 뒤 행방이 묘연해졌다. 진자는 소년 잃고 나서 슬퍼하고 그리워하였다. 한편, 그는 미시의 자비로운 혜택을 한 몸에 입고 그의 덕화를 계승하여 도를 닦았는데, 만년에 어디에서 일생을 마쳤는지에 대해서는 알 수 없다.
‘미시’와 ‘미력(彌力)’은 서로 비슷한 말로서, 서로 바꾸어 불렀다고 전한다. 고려 때까지도 신선을 ‘미륵선화’라 하고, 중매하는 사람을 ‘미시’라고 불러 온 것은 바로 진자의 유풍(遺風)이다. 진자가 미시를 처음으로 본 길가에 있던 나무를 견랑수(見郎樹)라 하였는데, 우리말로 사여수(似如樹, 또는 印如樹)라고 불렀다.
이 설화는 미륵에 관한 최초의 우리 기록으로서 신라 미륵 사상의 독특한 면모를 보여 주고 있다. 미륵이 화랑( 국선)으로 화현한다는 생각은 화랑이 곧 미륵이라는 의식을 밑에 깔고 있다. 이러한 의식을 바탕으로 신라의 화랑도가 크게 떨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