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옹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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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암집 / 민옹전
연암집 / 민옹전
한문학
작품
1757년(영조 33) 박지원(朴趾源)이 지은 한문 전기(傳記).
• 본 항목의 내용은 해당 분야 전문가의 추천을 통해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내용 요약

「민옹전」은 1757년(영조 33) 박지원이 지은 한문 전기이다. 실존 인물인 민유신의 일화와 작자가 민유신을 만나 겪었던 일들을 엮은 전기이다. 『연암별집』 「방경각외전」에 실려 있다. 「민옹전」은 유능한 재주와 포부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능력을 펼 수 없었던 조선 말기의 불우한 무관이었던 민옹을 그렸다. 박지원은 「민옹전」의 창작경위에 대해서 경구로서 게으른 자들을 경계할 수 있을 것이라고 하였다. 박지원은 우스갯소리가 중심이 된 전의 형식을 빌려서 소설을 실험한 것으로 보인다. 이 작품은 박지원의 실학적 인도주의의 바탕을 엿보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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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1757년(영조 33) 박지원(朴趾源)이 지은 한문 전기(傳記).
내용

1757년(영조 33) 박지원(朴趾源)이 지은 한문 전기(傳記). 실존 인물인 민유신(閔有信)이 죽은 뒤에 그가 남긴 몇 가지 일화와 작자 스스로 민유신을 만나 겪었던 일들을 엮고 뇌(誄 : 죽은 사람의 생전의 공덕을 기리는 글)를 붙인 전기이다. 『연암별집(燕巖別集)』 「방경각외전(放璚閣外傳)」에 실려 있다. 내용은 다음과 같다.

남양(南陽)에 사는 민유신은 이인좌(李麟佐)의 난에 종군한 공으로 첨사(僉使)를 제수받았다. 그러나 집으로 돌아온 뒤로 벼슬하지 않았다. 어릴 때부터 매우 영특하였다. 그는 옛사람들의 기절(奇節)과 위적(偉蹟)을 사모하여 7세부터 해마다 고인들이 그 나이에 이룬 업적을 벽에다 쓰고 분발하였다. 그러나 아무런 일도 이루지 못한다. 70세가 되자 그 아내가 올해는 까마귀를 그리지 않느냐고 조롱하였다. 민옹은 아내의 말을 듣고 기뻐하며 범증(范增)은 기이한 계교를 좋아하였다고 쓰고는 태연하였다.

박지원이 18세에 병으로 누워 음악 · 서화 · 골동 등을 가까이하고 때로는 손님을 청하여 해학과 고담을 들으며 마음을 위안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우울한 증세는 풀 길이 없었다. 마침 민옹을 천거하는 이가 있어서 그를 초대하였다. 민옹은 도착하자마자 인사도 나누지 않고 때마침 피리 불던 이의 뺨을 때리고는 “주인은 기뻐하는데, 너는 왜 성을 내느냐”고 꾸짖었다. 작자는 웃으며 악공들을 돌려 보내고 그를 맞이했다. 이 때에 민옹의 나이는 73세였다. 민옹은 기발한 방법으로 환자의 입맛을 돋우어주고 잠을 잘 수 있게 해주었다.

민옹은 어느 날 밤에 함께 자리한 사람들을 마구 골려대고 있었다. 그들은 민옹을 궁지에 몰아넣으려고 어려운 질문을 퍼부었으나 민옹은 끄떡도 않고 대답하였다. “귀신을 보았는가?” “어두운 데 앉은 사람이다.”, “신선은?” “세상 살기를 싫어하는 가난한 사람.”, “나이 많은 것은?” “글을 많이 읽은 사람.”, “가장 맛좋은 것은?” “소금.”, “불사약은?” “밥.”, “가장 무서운 것은?” “자기 자신.” 이처럼 그의 대답은 쉽고 막힘이 없었으며, 자기를 자랑하기도 하고 옆사람을 놀리기도 하여서 모두 웃었으나 그는 얼굴빛도 변하지 않았다.

함께 있던 사람 중에 누군가가 해서(海西)에 황충(蝗蟲 : 누리. 메뚜기과에 속하는 곤충)이 생겨 관가에서 황충잡이를 독려한다고 하였다. 이 말을 듣고 민옹은 곡식을 축내기로는 종로 네거리를 메운 칠척장신의 황충보다 더한 것이 없는데, 그것들을 잡으려 하나 커다란 바가지가 없는 것이 한이라고 하여 일좌를 어리둥절하게 하였다. 어느 날 민옹이 찾아오자 작자는 파자(破字)로 그를 놀렸다. 그러나 민옹은 놀리는 말을 칭찬하는 말로 바꾸어 버렸다. 그 다음 해 민옹은 죽었다. 민옹은 『역경(易經)』에 밝고 『노자』를 즐겨 읽었으며, 보지 않은 글이 없었다고 한다.

박지원은 「민옹전」의 창작경위에 대해서 작품 안에서 “금년 가을에 나는 병이 심하나 민옹을 볼 수 없었다. 그러므로 민옹과 주고받았던 은어(隱語) · 골계 등을 엮어 「민옹전」을 짓는다.”하였다. 「방경각외전」의 자서에서는 “민옹이 골계에 의탁하여 풍자한 것이 세상을 비웃는 공손하지 못함이 있다. 그러나, 경구(警句)를 써서 분발한 것은 게으른 이들을 경계할 수 있을 것이므로 이에 「민옹전」을 썼다.”고 서술하고 있다. 이 말은 문학의 효용을 설명한 것으로, 희언(戱言)이 희언으로만 그치지 않는 것임을 증언한 것이다.

「민옹전」은 민옹의 두 아들에 대한 것까지 서술한 전(傳)이다. 그러나 희언이 중심이 되고 있어서 전의 형식을 빌려 소설을 실험한 것처럼 보인다. 민옹이 벽에 썼던 경구는 기발하고 묘미가 있으며, 작자와 민옹이 만나는 장면은 극적으로 생동하고 있다. 「민옹전」은 후반에서 민옹과 그를 상대한 여러 사람들의 갈등이 서술되고 있다. 그러나 그 갈등은 이미 힘의 균형을 잃고 있어서 민옹의 익살이 돋보이게 된다.

두꺼비와 토끼가 나이 다툼하는 민간설화가 적절히 이용되고, 인간을 황충으로 비하시킨 풍자가 날카롭다. 소금을 ‘素金(소금)’ 멸구를 ‘滅穀(멸곡)’으로 표기한 것과, 민(閔)을 파자하여 춘첩자(春帖子 : 입춘 무렵에 門에 써붙이는 글. ‘門’과 ‘文’을 합하면 ‘閔’이 된다.)로 표현한 것이 재치 있다.

「민옹전」은 유능한 재주와 포부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펼 수 없는 조선 말기의 무반(武班)계통을 풍자적으로 설정하여, 불우한 무관이었던 민옹을 그린 것이다. 이 작품에서 작가는 인정의 기미를 날카롭게 파헤쳤다. 이 작품은 작자의 실학적 인도주의의 바탕을 엿보게 한다.

참고문헌

『연암집(燕巖集)』
『연암소설연구』(이가원, 을유문화사, 19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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