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은 전하지 않고 그 제목만 『연암별집(燕巖別集)』 「방경각외전(放璚閣外傳)」에 들어 있다. 그러나 작자 스스로 작품 제작의 경위를 밝힌 자서(自序)가 있고, 또 그 끝에 작자의 아들인 종간(宗侃)의 기록이 들어 있어서 그 내용을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으나 저작 연대는 미상이다.
작자는 자서에서 “집에서 효도하고 밖에서 공경하면 배우지 않았더라도 배웠다고 이르겠다는 말이 비록 지나친 말이긴 하나, 위덕(僞德)을 경계할 수는 있다. 공명선(公明宣)은 증자(曾子)의 문하에서 3년을 지내면서 글은 읽지 않았으나 잘 배웠다. 밭갈이하는 농부가 그 아내를 대하기를 손님처럼 하여 서로 읍(揖)하고 맞으니 눈으로 글씨를 알지는 못해도 진학(眞學)이라 하겠다. 이에 「봉산학자전」을 쓴다.”고 밝혔다.
이로 보아 봉산에 사는 어떤 농부가 글은 비록 모르나 손수 농사지으며 독실하게 행동함이 학자의 모범이 될 만하므로 「봉산학자전」을 쓴 것이 아닌가 한다. 이 작품이 없어지게 된 것은 당시 세도있던 어떤 인물을 풍자한 「역학대도전」과 연권(聯券)이 되어 있었다.
그 인물이 패하자 작자 스스로 그 작품을 불태우게 되어 같이 없어진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이 작품은 작자가 후기에 쓴 「허생전(許生傳)」의 저본이 되었을 가능성도 없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