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수승에 대한 최초의 기록은 신라 소지마립간(炤知麻立干, 재위 479~499) 대에 궁 안의 불당에서 향을 태우며 불교의식을 담당하였던 『 삼국유사(三國遺事)』의 사금갑설화(射琴匣說話) 속 승려에서 찾을 수 있다. 사금갑설화에 따르면 분수승은 궁주(宮主)와 몰래 정을 통하다가 왕에게 발각되어 처형되었다고 한다.
분수승과 궁주의 내통은 까마귀와 쥐, 노인(老人), 일관(日官) 등에 의해 밝혀졌다. 이 설화는 신라의 풍속인 오기일(烏忌日)과 유적지인 서출지(書出池)의 내력을 설명하기 위해 서술된 것으로 보이지만, 신라로의 불교 전래와 관련하여 신라 제21대 왕 소지마립간 대의 분수승 출현이 갖는 의미를 적지 않게 보여준다.
신라 불교의 공인 시기는 대체로 법흥왕(法興王, 재위 514~539) 대로 보는데, 그보다 이전인 소지마립간 대에 왕실의 내전(內殿)에 불당과 함께 분수승이 설치되어 있었던 점은 일찍이 신라 왕실에서 불교가 신앙되고 있었음을 알려 준다. 이는 왕비 혹은 왕비에 버금가는 높은 신분의 궁주가 분수승과 밀접하게 관계를 맺고 있었다는 점에서도 왕실의 불교에 대한 왕의 이해 또는 용인의 분위기를 짐작할 수 있다.
이렇게 볼 때 분수승과 궁주의 관계를 왕에 대한 위협으로 파악하고, 왕에게 분수승과 궁주의 처형을 건의한 일관 등은 토착신앙의 담당자로서 왕실의 불교 신앙에 반대하였던 것으로 볼 수 있다. 일관들의 영향력은 법흥왕 대의 불교 공인을 위해 이차돈(異次頓)이 순교할 때까지 계속되었다.
분수승과 궁주의 내통이 역모로 확대된 배경에는 소지마립간과 다음 왕위를 이은 지증왕(智證王, 재위 500~514) 사이에 갈등이 있었기 때문으로 보인다. 즉, 궁주를 소지마립간의 비였던 선혜부인(善兮夫人)으로 볼 수 있다면 그녀가 소생 없이 사망할 경우 지증왕의 등극 가능성이 높아질 수 있었기 때문이다.
다만 분수승의 처형이 동반되면서 불교 세력의 반발도 상당했으리라 짐작된다. 이에 소지마립간은 사금갑 사건 이후 일선(一善) 지역에 빈번히 행차하여 이를 무마하고자 하였다. 일선은 고구려로부터 신라로 처음 불교가 전래된 지역으로, 불교 세력이 상당히 형성되어 있었을 것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