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우는 남북국시대 통일신라의 사인(舍人)이다. 신라와 당의 연합군이 백제와 고구려를 멸망시킨 후, 당나라는 퇴각하지 않고 오히려 신라를 습격하려 하였다. 이에 신라가 군사를 일으키니 당 고종(高宗, 재위: 649~683)이 김인문(金仁問), 한림랑(翰林郎), 박문준(朴文俊) 등을 불러 감옥에 가두고 신라를 침략하고자 하였다.
김인문이 이를 알고 신라로 귀국하는 의상(義相)에게 당군의 침략을 본국에 알리게 하였다. 신라는 각간(角干) 김천존(金天尊)의 건의로 사천왕사(四天王寺)를 짓고 명랑(明朗)이 문두루비법(文豆婁秘法)을 지어 당나라 군대를 두 차례의 해전에서 격퇴하였다. 문무왕은 당 고종이 관대하게 용서해 줄 뜻이 있다는 말을 듣고 강수(强首)에게 「청방인문표(請放仁問表)」를 짓게 한 후, 이를 사인이었던 원우로 하여금 당나라에 올리게 하였다. 표문에 감동한 당 고종은 김인문을 석방하였다.
이렇듯 원우에 대한 기록은 간략하지만, 이를 통해 그의 관직인 사인의 역할을 알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신라 중고기(中古期)에 설치된 사인이 중대(中代)에도 존재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사인은 『삼국사기』 직관지에는 명칭이 보이지 않아 여러 사례를 통해 설치 시기 및 발달 과정 등을 짐작할 수 있을 뿐이기 때문이다.
사인에 대한 최초의 기록은 법흥왕(法興王, 재위: 514~540) 대 이차돈(異次頓)에게서 찾을 수 있다. 이차돈은 근신(近臣), 소신(小臣), 내양자(內養者) 등으로도 지칭되었으므로 사인의 직장(職掌)은 국왕의 근시직(近侍職)으로 파악된다. 이는 원우의 역할을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다만, 사인은 진평왕(眞平王, 재위: 579632) 대에 상사인(上舍人)과 하사인(下舍人)으로 분화되었고, 사량궁(沙梁宮)에도 사인을 두는 등의 변화가 있었다. 신라 하대(下代)인 경문왕(景文王, 재위: 861875) 대에 중사인(中舍人)이 보이는데, 문무왕 대 원우가 사인으로만 나타난 점에 주목할 수 있다. 즉, 사인은 궐내에서 복무하는 복수의 하급 신료들을 범칭한 것으로도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