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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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사
인물
남북국시대 통일신라의 사인(舍人).
인물/전통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미상
사망 연도
미상
주요 관직
통일신라 사인(舍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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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요약

원우는 남북국시대 통일신라의 사인(舍人)이다. 나당연합군에 의해 백제와 고구려가 멸망한 뒤에도 당군이 퇴각하지 않고 신라를 침략하려 하자 신라는 군사를 일으켰다. 이에 당 고종은 김인문(金仁問), 한림랑(翰林郎), 박문준(朴文俊) 등을 불러 감옥에 가두고 신라를 침략하고자 하였다. 이후 문무왕은 강수에게 「청방인문표(請放仁問表)」를 짓게 한 후 이를 사인이었던 원우로 하여금 당나라에 올리게 하였다. 표문에 감동한 당 고종은 김인문을 석방하였다.

목차
정의
남북국시대 통일신라의 사인(舍人).
활동 사항

원우는 남북국시대 통일신라의 사인(舍人)이다. 신라와 당의 연합군이 백제와 고구려를 멸망시킨 후, 당나라는 퇴각하지 않고 오히려 신라를 습격하려 하였다. 이에 신라가 군사를 일으키니 당 고종(高宗, 재위: 649~683)이 김인문(金仁問), 한림랑(翰林郎), 박문준(朴文俊) 등을 불러 감옥에 가두고 신라를 침략하고자 하였다.

김인문이 이를 알고 신라로 귀국하는 의상(義相)에게 당군의 침략을 본국에 알리게 하였다. 신라는 각간(角干) 김천존(金天尊)의 건의로 사천왕사(四天王寺)를 짓고 명랑(明朗)문두루비법(文豆婁秘法)을 지어 당나라 군대를 두 차례의 해전에서 격퇴하였다. 문무왕은 당 고종이 관대하게 용서해 줄 뜻이 있다는 말을 듣고 강수(强首)에게 「청방인문표(請放仁問表)」를 짓게 한 후, 이를 사인이었던 원우로 하여금 당나라에 올리게 하였다. 표문에 감동한 당 고종은 김인문을 석방하였다.

이렇듯 원우에 대한 기록은 간략하지만, 이를 통해 그의 관직인 사인의 역할을 알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신라 중고기(中古期)에 설치된 사인이 중대(中代)에도 존재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사인은 『삼국사기』 직관지에는 명칭이 보이지 않아 여러 사례를 통해 설치 시기 및 발달 과정 등을 짐작할 수 있을 뿐이기 때문이다.

사인에 대한 최초의 기록은 법흥왕(法興王, 재위: 514~540) 대 이차돈(異次頓)에게서 찾을 수 있다. 이차돈은 근신(近臣), 소신(小臣), 내양자(內養者) 등으로도 지칭되었으므로 사인의 직장(職掌)은 국왕의 근시직(近侍職)으로 파악된다. 이는 원우의 역할을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다만, 사인은 진평왕(眞平王, 재위: 579632) 대에 상사인(上舍人)과 하사인(下舍人)으로 분화되었고, 사량궁(沙梁宮)에도 사인을 두는 등의 변화가 있었다. 신라 하대(下代)인 경문왕(景文王, 재위: 861875) 대에 중사인(中舍人)이 보이는데, 문무왕 대 원우가 사인으로만 나타난 점에 주목할 수 있다. 즉, 사인은 궐내에서 복무하는 복수의 하급 신료들을 범칭한 것으로도 볼 수 있다.

참고문헌

원전

『삼국사기(三國史記)』
『삼국유사(三國遺事)』

논문

김숙희, 「신라 중고기 國王近侍組織의 정비와 內廷機構」(『대구사학』 136, 대구사학회, 2019)
이문기, 「신라 洗宅(中事省)의 機能과 官制的 位相의 變化」(『역사교육논집』 51, 한국역사교육학회,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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