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장이 뛰어나 당시 대당 외교에 크게 공을 세웠다. 신라는 당과 연합해 백제와 고구려를 멸망시킨 뒤 삼국통일을 눈앞에 두었으나, 당나라는 백제와 고구려의 옛 땅 뿐만 아니라 신라까지도 지배하려 하였다. 당시 당나라에 유학하고 있던 승 의상(義湘)이 당나라의 이러한 의도를 알아차리고 급히 귀국해 당나라의 내침을 보고하였다. 문무왕은 군신을 불러 모아 그 대책 마련에 부심하였다. 이 때 각간(角干)김천존(金天尊)이 법사 명랑(明朗)이 비법을 알고 있다 하며 추천하였다.
명랑이 낭산(狼山) 남쪽에 신유림(神遊林)이 있는데 그곳에 사천왕사(四天王寺)를 지으면 당나라군을 격퇴할 수 있을 것이라 해 절을 창건하였다. 당나라의 내침이 있자 명랑이 유가승(瑜伽僧) 12명을 거느리고 문두루비법(文豆婁秘法)을 짓자 파도가 일어나 당나라의 병선이 침몰하였다. 671년(문무왕 11)에 다시 당나라가 침략했으나 역시 실패로 끝났다.
박문준은 당시 한림랑(翰林郎)으로서 김인문(金仁問)을 따라 외교 사절로 당나라에 가 있다가 김인문과 함께 투옥되었다. 당나라 고종(高宗)은 박문준을 불러 신라에는 외적을 물리칠 수 있는 무슨 비법이 있는지를 물었다. 이 때 그는 당나라에 온 지 10여 년이 되어 본국의 일을 알지 못하다가, 당나라의 은혜를 입어 삼국을 통합했으므로 그에 보답하고자 천왕사(天王寺)를 창건해 황제의 만수(萬壽)를 빌고 있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 있을 뿐이라고 대답하였다.
이에 당나라 고종은 기뻐하면서 예부시랑(禮部侍郎)악붕구(樂鵬龜)를 신라에 파견해 그 절을 조사하게 하였다. 문무왕은 이 소식을 듣고 사천왕사의 남쪽에 새로이 절을 짓고 사신에게 뇌물을 주어 속였다. 사신이 돌아가 박문준의 말이 사실인 것처럼 보고하였다. 문무왕은 이때를 이용해 문장가 강수(强首)로 하여금 김인문의 일행을 석방하게 하는 표문(表文)을 지어 올리게 하니 당나라 고종이 이에 따랐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