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일신라시대 왕명을 문서로 작성하고 왕의 자문에 응하던 한림대(翰林臺)의 우두머리 관직이다. 신라의 한림대는 당나라의 한림원(翰林院)을 모방하여 경덕왕대에 종래의 통문박사(通文博士)를 개칭한 것으로, 거기에는 한림랑·한림대조(翰林待詔)·한림서생(翰林書生) 등의 관원이 있었다.
이들은 이른바 한림대의 학사직(學士職)으로, 이 관직에는 문장과 학문에 능한 사람들이 주로 임명되었다. 특히 한림대의 최고 관직인 한림랑은 당나라에 유학하고 돌아온 당대의 문사(文士)들로써 충당하였고, 6두품 출신이 이 관직에 많이 진출하였다.
그리고 한림랑에는 관등이 사찬(沙飡) 정도인 사람이 임명되었다. 성덕대왕신종(聖德大王神鐘) 명문(銘文)의 서문과 사(詞)를 찬술한 사찬 김필오(金弼粤), 창림사무구정탑원기(昌林寺無垢淨塔願記)를 지은 김입지(金立之), 대안사적인선사비명(大安寺寂忍禪師碑銘)을 지은 최하(崔賀), 헌덕왕대에 견당사로서 활동한 김인규(金仁圭) 등은 모두 한림랑의 관직을 역임했던 사람들이다.
880년 경에 한림대가 서서원(瑞書院)으로 개명됨에 따라 한림랑은 서서원 학사(學士)로 바뀌어 신라 하대 문한기구의 중추적 존재로서 존속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