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랑도는 신라의 화랑과 그 낭도들이 사상적으로 간직하고 실천하려고 힘썼던 도리이다. 화랑도는 현대에 만들어진 개념이고, 역사 기록에는 풍월도·풍류도로 쓰여 있다. 진흥왕 때 화랑제도가 창설되었는데 그 사상적 연원은 이전부터 존재하던 전통적인 고유사상이었을 것으로 판단된다. 고유사상은 역사 기록에서 ‘현묘한 도리’라고 표현하는데 신도사상·무속신앙·신선사상 등이다. 이 세 가지 사상은 때마침 전래된 불교·유교 등 고급 종교의 도움을 받아 사상적으로 정비되어 체계화되었고, 진평왕대에 이르러 원광법사 세속오계라는 실천적 강령으로 정리되었다.
화랑도라는 용어는 화랑과 그 낭도들이 활약하던 당시에는 사용되지 않았고, 현대에 이르러 ‘화랑과 그 낭도들이 신봉했던 도리’라는 단순한 뜻으로 쓰이면서 일반화된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사실은 화랑제도를 창설한 진흥왕(540∼576)과 관련된 기록, 즉 『삼국유사』 권3 미륵선화(彌勒仙花) · 미시랑(未尸郞) · 진자사(眞慈師)조의 “왕이 나라를 융흥하게 하려면 반드시 풍월도(風月道)를 진흥시켜야 한다고 생각하고, 다시 영을 내려 양가 남자 중에서 덕행이 있는 자를 뽑아 화랑이라 고치고 비로소 설원랑(薛原郞)을 받들어 국선을 삼으니 이것이 화랑국선의 시초이다(王又念欲興邦國須先風月道更下令選良家男子有德行者改爲花娘始奉薛原郞爲國仙此花郞國仙之始). ……”고 한 기록을 통해서 알 수 있다.
또한, 『삼국사기』 본기 진흥왕 37년조의 “최치원(崔致遠)이 쓴 난랑비 서문에 이르기를 나라에 현묘한 도가 있었으니 풍류(風流)라 일컬었다. 교를 마련한 연원은 『선사(仙史)』에 자세히 밝히고 있거니와 실로 삼교를 포함하고 있다(崔致遠鸞郞碑序曰國有玄妙之道曰風流設敎之源備詳仙史實乃包含三敎). ……”고 한 기록과
근간에 세상에 알려져 관심을 끌고 있는 김대문(金大問)이 썼다는 『화랑세기(花郞世記)』에서 화랑들을 한결같이 풍월주(風月主)로 부르고 있는 기록 등으로 미루어,
그 당시에 ‘화랑도’라는 말이 쓰이지 않고 ‘풍월도’ 혹은 ‘풍류(도)’라는 말이 쓰였다는 사실(史實)이 확인된다.
이와 같이 풍월도나 풍류(도) 등의 호칭이 화랑도의 동의어로 쓰였을 뿐 아니라, 화랑제도가 창설된 시기인 진흥왕 37년(576)에 앞서서 이미 사용되어 왔다는 사실은 화랑도의 사상적 맥락이 선대로부터 이어져왔음을 말해주는 것이기도 하다.
사료의 측면에서 보면, 『삼국사기』 본기 제4 진흥왕 23년 9월조에 사다함(斯多含) 이야기가 나오고, 『삼국사기』 열전 제4에서는 진골출신 화랑이라고 했으나 화랑제도가 마련되기 14년 전의 일인 만큼 풍월주로 표시함이 이치에 맞는다.
『동국통감』에서는 진흥왕 원년조에 “신라에서는 동남(童男)으로 용의단정한 자를 선발하여 풍월주라 부르고 착한 선비를 구해 그의 무리를 삼아 효제충신을 힘써 행하게 하였다(新羅選童男容儀端正者號風月主求善士爲徒以礪孝悌忠信). ……”라고 한 기록이 있어, 풍월도의 연원이 진흥왕 원년(540) 이전인 법흥왕 시대로 이어짐을 알 수 있다.
이러한 내용은 앞에서 언급한 『삼국사기』 진흥왕 37년조의 내용과 더불어 분석할 때 중요한 점이 밝혀진다. 즉, “나라의 현묘한 도가 있었으니(혹은 있으니)”라는 내용의 시기가 법흥왕 시대 이전으로 소급하게 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나라에는 법흥왕 이전부터 전해오는 현묘한 도리가 있어 풍류라 일컫는데, …… 유교 · 불교 · 도교 중의 어느 것도 아니고, 이들 3교가 갖추고 있는 훌륭한 종교적 이념을 실질적으로 두루 포함해 갖추고 있다. ……”고 하여 ‘현묘한 도리’의 개념도 분명해진다.
이는 법흥왕 시대를 기준으로 할 경우, 불교만이 법흥왕 15년(528)에 신앙적 · 사상적인 충돌과 저항 등 많은 시련 끝에 어렵게 공인되었고, 유교는 140년 이상이나 뒤인 신문왕 2년에야 국학(國學)이 정식으로 성립되어 일반화되기 시작했으며, 도교의 경우는 『삼국사기』 열전 제4 김인문조와 본기 제9 효성왕조에서 비로소 이와 관련된 기록을 보게 되기 때문이다.
물론, 이러한 시기에 앞서서 공식적인 것은 아니라 할지라도 3교가 영향을 끼쳤을 경우를 배제할 수 없다는 주장도 가능하다. 그러나 이방(異邦)의 사상이 전래되고 수용되어 토착화해서 본래의 전통적 고유사상에 영향을 끼치기란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님을 감안할 때, ‘현묘한 도리’는 선대로부터 법흥왕대로 이어져 내려온 전통적인 것으로, 외래사상에 물들지 않은 고유한 사상이요, 능히 후대에 와서 전래된 유 · 불 · 도 3교의 종교적 이념을 두루 함축한다고 할 만하다.
이러한 ‘현묘한 도리’, 즉 화랑도의 사상적 요소는 신도사상(神道思想) · 무속신앙(巫俗信仰) · 신선사상(神仙思想: 仙家思想) 등 세 가지의 요소를 갖추고 있다고 하겠다.
(1) 신도사상적 요소 신라시대는 신의(神意)에 따라 국정을 운영하는 제정일치(祭政一致) 체제 아래의 철저한 신권국가(神權國家)였다. 개국 초기에 박혁거세(朴赫居世) 탄생과 관련된 설화의 신이성(神異性)과 더불어 육부촌장들에 의해 시조왕으로 추대되는 사실에서 뚜렷한 신도사상적인 모습을 본다.
당시 신라인들은 이러한 설화의 신이성을 통해 신의(神意)를 헤아렸고, 이러한 신의를 받은 신성한 인물을 추대해 군왕으로 추대하는 것이 신의에 순종하고 만복을 누릴 수 있는 길이라 여겼던 것이다. 이런 태도에는 인력이나 책략 등 사사로움이 끼어들 여지가 없었다. 신의를 잘못 헤아리거나 어기는 일이 가장 두려웠고 청순무구(淸純無垢)한 신앙적 심성만이 허용되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양상은 그 뒤로도 이어져 왕위 계승 같은 가장 중요한 일에서도 서로 겸양하며 추천해 인물 본위로 왕위를 이어갔다. 또한, 국정을 심의하는 마당에서도 참석자가 전원합의하는 제도, 즉 화백제도(和白制度)를 운영해 항상 지공무사(至公無私)한 결정을 이끌어내었다는 사실에서도 보게 된다.
신라인들이 이렇듯 신의에 부합되도록 심성의 순수성을 간직하고 신도사상에 철저했다는 것은 신(神=天)에 대한 제의(祭儀)를 철저히 하여, 신의를 헤아리고 공경하는 일에 최선을 다했음을 뜻한다.
대표적인 제의로서 신궁제의(神宮祭儀)와 무속신앙을 들 수 있다. 신궁제의의 경우는 『삼국사기』 신라본기 제3 소지마립간(炤知麻立干)조에 “나을에 신궁을 세웠다(置神宮於奈乙).”라는 기록이 있다.
또한, 『화랑세기』에는 “화랑은 선도(仙徒)이다. 우리나라는 신궁을 받들어 큰 제사를 하늘께 지냈다. …… 예전에 선도들은 신을 받드는 일을 위주로 삼았다(花郞者仙徒也, 我國奉神宮行大祭于天 …… 古者仙徒以奉神爲主). ……”는 기록이 있어 대강을 짐작할 수 있다.
(2) 무속신앙적 요소 무속신앙적 요소는 단군신화에서 원초적 연유를 찾을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흐름은 신라 개국 초기에도 분명히 이어졌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제1 남해차차웅조를 보면 “차차웅(次次雄)은 혹은 자충(慈充)이라고도 한다. 김대문이 말하기를 ‘방언으로 무당을 말하며, 세인이 무당으로써 귀신을 섬기고 제사를 받들었다. 때문에 이를 두려워하고 공경해 드디어 존장자를 자충이라 하게 되었다’고 하였다.”는 기록이 있는데, 여기에서 군왕 자신이 무속신앙의 중심인물이었음을 알 수 있다.
이와 같이 정치의 군장이 신앙의 중심이 되는 일은 신권정치하의 제정일치 체제 하에서는 흔히 볼 수 있는 일이며, 신라의 경우도 신도사상적 바탕과 더불어 국가적 차원에서 미치는 영향이 매우 컸던 것으로 보인다.
무속신앙은 특히 신인합일성(神人合一性)이 요구된다. 입신상태(入神狀態, ecstasy)에서나 빙신상태(憑神狀態, possession)에서나 영적합일(靈的合一)이 이루어져야 하기 때문이다. 즉, 신과의 사이에 협잡(挾雜)이라는 것은 생각할 수도 없고 절대적인 순수성만이 전제되어야 한다.
그러면 이렇듯 신도사상적인 면에서뿐만 아니라 무속신앙적인 면에서도 요구되었던 청순무구한 순수성을 신라인들은 어떤 방법으로 함양하려 했을까? 불교 신앙생활에 전념했던 일부 특수층을 제외하고는 현실 사회에서 살아야 했던 대부분의 신라인들에게는 어떠한 방법이 특별히 필요했을 것이다. 여기에서 유오산수(遊娛山水) 등의 신선사상적 수양 방법이 추구되어 세속을 초탈한 이념적 세계를 섭렵했고, 풍류나 풍월도 사상이 유행하게 되었다고 보인다.
(3) 신선사상적 요소 이와 관련해 첫째로 최치원의 난랑비 서문에 보이는 ‘선사(仙史)’라는 말에서 신선이나 선교적(仙敎的)인 것을 느끼게 되고, 이어서 나오는 풍류나 풍월이나 현묘라는 표현에서도 그러하다. 뿐만 아니라 화랑에 대한 칭호로는 『삼국유사』 권3에 ‘국선(國仙)’이 나오고, 『삼국유사』 권1 김유신조에서도 “검술을 익혀 국선이 되었다.”고 하여 국선이라는 말을 사용하였다.
『화랑세기』에서는 ‘선도(仙徒)’라는 말을 쓰고 있는데, 화랑들이 신선의 유풍을 본떠 명산에 노닐면서 수양한 사실은 화랑도가 신선사상적 바탕을 가지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여기서 우리는 우리 선인(先人)들이 전통적 무속신앙과 더불어 인간과 자연과의 조화를 추구하는 자연주의적 사상의 기조 위에서 고유한 신선사상을 가지고 있었음을 추론하게 된다.
이 점은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제5 동천왕조의 “평양은 본래 선인왕검의 택지이다(平壤者本仙人王儉之宅).”는 기록에서 왕검, 즉 단군(檀君)을 선인으로 표현하고 있는 사실에서 알 수 있다.
또한, 중국 『사기(史記)』와 『속문헌통고(續文獻通考)』에 “진시황 28년 …… 방사 서시 등이 상서에서 이르기를 바다 한가운데 삼신산이 있어 봉래 · 방장 · 영주라 하는데 선인이 거기에 산다고 하였다(秦始皇二十八年 …… 方士徐市等上 書言海中有三神山名蓬萊方丈瀛洲仙人居之). ……”는 기록이 있고,
『동방삭십주기(東方朔十洲記)』에는 “동쪽 바다 가까운 조주에는 불사초가 있다(祖洲近在東海有不死之草).”라는 기록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사실, 우리 선인들은 자연주의적인 면에서는 중국의 도교와 일면 상통하나, 양주(楊朱)와 노자(老子), 그리고 장자(莊子)로 이어지면서 사회 · 정치적 여건 속에서 은둔적 태도를 보이며 이룩된 중국의 도교와는 그 사상적 바탕이 다른 고유한 신선사상을 오랫동안 지녀왔다.
즉, 빼어나게 수려한 산수 속에서 인간과 자연과의 조화를 적극적으로 추구하는 가운데 전통적인 무속신앙과 신도사상에 융합되면서 독특한 자연관 내지 우주관이 형성되었는데, 이것이 바로 우리 선인들의 신선사상이라 하겠다.
이러한 독특한 모습은 신라인들의 낙천적 · 현실주의적 · 자연주의적인 모습에서, 산수에 노닐면서 고천기축(告天祈祝)을 행하며 심신을 연마하던 순수한 모습에서, 또 고구려 고분벽화에 그려져 있는 삼신산(三神山)과 대조(大鳥)를 타고 가는 신선의 그림 등에서 볼 수 있다.
신도사상 · 무속신앙 · 신선사상 등의 기본 요소를 바탕으로 전승되어 온 풍월도는 제천의례 등을 통해 신의를 헤아려 항상 따르려는 청순무구한 심성을 가다듬고, 상마이도의(相磨以道義) · 상열이가락(相悅以歌樂) · 유오산수(遊娛山水)하는 수양 방법으로 인격을 도야해 충효의 도리를 존중함(유교적)은 물론이고, 부귀를 생각하지 않으며(불교적), 자연 속에 유적해 그 도리를 터득하려는(선교적) 슬기로움을 갖추고자 하였다.
이처럼 유 · 불 · 도 3교의 교화적 의의를 모두 포함해 ‘현묘의 도리’라고 지칭되던 풍월도는 진흥왕 37년에 국가 융흥을 위해 국가적 차원의 화랑 조직으로 정비되었으나, 사상적 측면으로도 쇄신 · 발전되어야 하였다.
신권국가 사회에서 신탁(神託)과 계시(啓示)에 따른 오랜 습속과 청순무구한 신앙적 심성만을 바탕으로 이룩되어 온 풍월도로서는, 비록 사다함의 예에서 보듯이 아무리 훌륭한 이념적 구실을 해낼 수 있었다 해도, 왕권국가로 급격히 변화 · 발전하는 사회 상황 아래에서는 사회적 지도 이념으로서 미비할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풍월도는 때마침 전래된 불교 · 유교 등 고급 종교의 도움을 받아 사상적으로 정비되고 체계화되어가는 과정을 거치게 되었다. 즉, 모든 가치 기준을 신도(神道: 天道)에 두고 모든 행동 범절을 신의(神意: 天意)에 부합되도록 힘썼던 청순무구한 심성은 신(神) · 무(巫) · 인(人)이라는 종적 관계의 차원에서 횡적 관계인 인간관계로 파급되어 동족간의 단결을 강화시켜 공동체 의식을 공고히 하였다.
나아가 신앙적이기까지 한 철저한 의리사상, 고결한 정의감, 멸사봉공할 수 있는 숭고한 희생정신, 군신(君臣)이 더불어 보국안민(輔國安民)하고자 하는 투철한 정신을 크게 진작하는 등 화랑도의 본래적인 특징이 고양되어 새로운 사회변화 및 발전에 크게 기여하게 되었다.
그리고 마침내 진평왕대에 이르러서는 당시 국가적 지도자로서 추앙을 받던 원광법사(圓光法師)에 의해 이른바 ‘세속오계(世俗五戒)’라는 구체적 실천 강령으로 정리되었다고 하겠다.
사군이충(事君以忠) · 사친이효(事親以孝) · 교우이신(交友以信) · 임전무퇴(臨戰無退) · 살생유택(殺生有擇)의 세속오계에 관해서는 여러 관점에서 많은 논의가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이 짤막한 ‘세속오계’는 신라인 특히 화랑들이 갖추어야 할 윤리강령을 빠짐없이 담고 있다는 평가를 받는다.
또한, ‘실내포함삼교(實乃包含三敎)’ · ‘현묘지도(玄妙之道)’라고까지 한 풍월도, 즉 화랑도의 차원에서는 비록 미흡하더라도, 당시 신라의 시대정신을 대표한 화랑도사상이 세속오계를 통해 문화적 · 종교적으로 훌륭히 정리되었다고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