잔치는 경사에 음식을 차려 놓고 손님을 청하여 먹으며 즐기는 풍습이다. 주인과 손님 사이의 의례는 물론 잔치를 여는 과정 모두가 격식을 갖추어 진행된다. 부여의 영고, 고구려의 동맹 같은 제천행사에서 유래했으며, 고려에서는 국가적 제전으로 연등회와 팔관회가 거행되었다. 조선시대에는 왕실의 탄신·책봉·혼례 등 경사가 있을 때 잔치를 올렸고, 민간 차원에서는 세시풍속으로서 고을 단위 민속놀이와 개인들의 통과의례와 관련한 기념잔치들이 행해졌다. 오늘날의 각종 대회, 파티, 리셉션, 위안·경로·기념 행사, 향토 축제도 잔치에 속한다.
주인이 손님을 접대하는 방식이 보통 이상이면 그것은 잔치라고 일컬어진다. 잔치란 생일이나 혼사를 빌미로, 취임이나 승진, 환영이나 축하를 계기로 음식을 마련해서 손님을 불러 여러 사람이 먹고 마시고 노래하고 춤추며 흥겹게 노는 일련의 과정을 가리킨다.
그 과정에는 손님의 품위나 격에 맞추어 초청하고 맞이하는 준비가 있다. 즉, 앉을 자리의 배정, 손님맞이의 의물(儀物)과 의상, 음식마련과 상차림, 환영의 의식만이 아니라 잔치를 베푸는 때와 장소의 결정, 선물교환, 작별의식 등 엄숙한 형식에 곁들여 즐거운 놀이의 난장이 있다.
형식과 난장은 질서와 무질서를 말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잔치’라는 관념에는 두 가지 모습이 있다. 그것은 위로는 하늘과 신성을 대상으로 하면서 임금과 신하, 주인과 머슴에 이르는 인간의 사회적 상하관계가 상징체계로 어우러진다. 잔치를 통해서 사람들은 격의없이 하나가 된다. 엄격한 형식의 질서에서 상하가 없는 무질서의 하나가 된다.
잔치는 사람과 사람 사이의 벽을 허문다. 원래 잔치란 구조적으로 주인과 손님의 대인관계를 상징적으로 체계화하는 것이다. 나아가 하늘과 신성에 대한 인간의 관계를 풀어내는 의식(儀式)이기도 하였다. 잔치는 단순히 먹고 마시고 노는 것만이 아니라 사람과 사람의 관계를 정립하고 풀어내는 것이다.
그 가운데 주인과 손님, 하늘과 사람, 거룩한 것과 속된 것이 어우러져서 ‘잔치’라는 행사 가운데 맨 처음 하늘이 열리고 인간사회가 이룩되던 무렵의 천지창조가 숨쉬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물론 지금 우리가 행하는 잔치는 그런 거창한 구조까지 따지고 들 것이 없지만, 그것이 사람이 사는 사회적 · 종교적 기구와 제도이며 신화적 · 예술적 차원까지 따질 수 있을 정도로 유래가 깊다는 사실은 인식해야 할 것이다.
잔치가 다양해지고 잔치를 일컫는 말도 여러 가지라서 그 개념을 분명하게 정하기는 어려우나 잔치가 여러 사람들의 어울림인 것만은 분명하다. 잔치가 술과 음식을 연상시키고 나아가 노래와 춤의 자리로 연결되면 그것은 향연 · 연회 · 축제 · 대동놀이 및 각종 집회 · 대회를 일컫는 것이 된다.
떠들썩한 놀이판이라는 뜻에서 잔치는 굿이라는 낱말과 함께 굿잔치라든가 놀이잔치, 큰잔치판 등의 말을 만들어내기도 한다. 그런 면에서 보면 잔치는 놀이와 관련되고 난장판과 맥락을 같이한다. 그런 어울림 가운데 사람만이 아니라 신성의 존재도 즐거워져서 사람들의 소원을 들어준다.
잔치는 얼핏 보면 그냥 즐기는 것 같지만 실상은 주고받는 의식이라 할 수가 있다. 잔치가 손님에 대한 주인의 접대인 경우는 그 대상이 분명히 ‘손’이 된다. 그 손님이 신성의 존재, 하느님이나 신령이나 조령(祖靈)쯤 되면 웃어른을 모시는 아랫것들의 정성바침이 잔치가 되고, 그 잔치는 정성바침만큼의 반대급부가 따라야 한다. 영험스러운 부처님이라야 젯밥 차례가 돌아간다는 것이다. 이것은 바치는 것, 먹이는 것이 단순히 그냥 바치고 먹이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강조하는 것이다.
잔치의 주연(酒宴)은 주는 것만큼 받는 것이 전제된다. 그것은 교환의 원칙에 입각한 인간공동체의 의례이다. 그 과정에 곤드레의 난장판이 벌어져 사람과 사람의 관계, 주객의 관계, 인간과 신의 관계가 함몰되어버리는 사태로 발전한다.
주인이 손님에게 베푸는 대접은 손님으로서 갚아야 하는 부채가 된다. 그런 원리가 기도의 대전제가 되는 것이다. 손님으로, 어른으로, 신성의 존재로 향연을 받았으면 주인의, 아랫사람의, 세속적인 인간의 소망을 들어주어야 한다. 잔치는 그런 구실을 한다.
주인이 아랫것들을 배불리 먹이고 흥겹게 놀게 하는 풋굿, 호미씻이 잔치는 아랫것들이 손님인 경우이다. 손님은 주인의 소청을 들어주어야 하기 때문에 주인의 잔치는 그냥 먹이는 것이 아니라 신령의 영험을, 아랫것들의 노동력을 반대급부로 받아내어야 하는 것이다.
생일잔치나 혼인잔치에는 금반지 · 옷가지 등의 부조(扶助)가 들어간다. 먹고 마신 대가가 지불되기 때문에 여기에 교환의 원리가 작용한다.
그러나 우리는 잔치를 일컬어 흥겨움의 자리로 풀이한다. 흥겹지 않은 잔치란 존재할 수 없다. 흥겹기 때문에 잔치는 축제 · 여흥 · 놀이 · 난장판의 이미지를 지니고 있다.
무질서한 열광의 잔치라고 하지만 우리는 잔치가 베풀어지는 일정한 시간과 공간의 약속 때문에, 그리고 잔치가 진행되는 의식의 절차 때문에 열광 · 도취와 정반대되는 형식성 · 장엄미 · 질서를 무시할 수가 없다.
따라서 잔치가 가지는 양면성에 대해서 생각해야 한다. 또한, 잔치가 베풀어지는 시간과 장소를 따져야 하고, 주인과 손님이라는 인간관계를 대상으로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게다가 잔치의 제수(祭需)도 따져야 한다. 뿐만 아니라 그러한 잔치가 공적인 차원인가, 사적인 것인가? 그 기원은 어디에 있는가를 따지지 않을 수 없다. 그렇게 따져나가려면 근거가 있어야 하는데, 그것을 찾아내기란 그리 쉽지 않다.
우선 잔치라는 이미지에서 느끼는 질서와 무질서의 상념에서부터 양면성을 드러내고 있어 개념이 완전히 정립되었다고 할 수 없는 것이다. 그것이 인간사임에는 틀림없으나 신성과 관련되면 종교적인 측면에서 대답하기 어려운 문제들이 야기된다.
또한,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는 사회학적인 측면에서 공동체의식과 상관하고, 자리배정 등 이른바 사회관계(주인과 손님, 손님의 비중 등)를 상징화하는 것이 바로 사람과 사람의 관계를 표상하는 것이다.
따라서, 대상의 선정과 사회관계의 농도를 반영하는 잔치자리는 그냥 난장판의 흥겨움만으로 끝내버릴 수가 없다. 그러한 문제들을 수렴하면서 잔치를 바라보면 쉽게 개념을 정립하고 정의를 내리기가 어렵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우리는 잔치의 범주를 연회 · 향연 · 주연 · 축제 · 들놀이 심지어 굿이라든가 시회(詩會)에까지 확대하고 있다. 각종 대회 · 현대적인 파티 · 리셉션 · 위안 · 경로 · 기념행사 · 축하자리에도 잔치라는 표현을 붙이는 것이다.
먹고 마시고 노래하고 춤추는 잔치가 복잡한 구조와 상징을 갖추게 되는 과정을 살펴보기 위해서는 우선 그 역사적인 기원부터 살펴보는 것이 순서일 것이다.
잔치는 제의와 밀접하게 연관된다. ‘굿’이 없는 잔치는 존재할 수 없다. 그 굿을 제의라고 하든 의식절차라고 하든 먼저 신성의 존재인 하늘이나, 신령이나, 조상에게 드리는 경건한 제사 다음에는 먹고 마시고 노래하고 춤추는 과정이 있어서 엄숙한 제의는 즐거운 축제로 마무리된다.
사람들은 언제나 진지하게 일만 하면서 살 수가 없다. 힘든 일로 쇠잔해가던 활력은 한 번씩 축제나 잔치를 통해서, 놀이나 난장판을 통해서 회복된다. 심적인 긴장에서 벗어나 자유로워져야 사람들은 다시 힘겨운 일의 일상성으로 되돌아갈 수가 있다.
그런 메커니즘은 인류문화의 발상기부터 이미 천부의 것으로 발견되어 있었다. 그것을 인식하거나 혹은 교묘히 그것을 활용하는 지혜가 없었을 뿐이지 질서의 중압과 해방과 활성의 획득, 그리고 다시 질서로의 순환은 우리 나라의 고대 사회에도 이미 기록으로 남아 있다.
그런 제도적인 잔치가 『후한서(後漢書)』 동이전(東夷傳)에 나오는 부여의 영고(迎鼓)이다. 기록에 의하면 “섣달에는 하늘에 제사를 지낸다. 이 때에는 사람들이 많이 모여 여러 날을 두고 술마시고 노래부르고 춤추고 논다.”라고 하였다.
고구려는 10월이면 하늘에 제사지내기 위해 많은 사람들이 모이는데, 이것을 이름하여 동맹(東盟)이라 하였다. 『후한서』에서는 “무제(武帝)가 북과 부는 악기와 배우를 주었다고 한다. 그래서 고구려는 풍습이 음란하다. 그러면서 깨끗한 옷을 입기 좋아하고 밤이면 남녀가 여럿이 모여서 배우놀이와 음악을 즐겼다.”라고 하였다.
그 기록을 반증하듯 『삼국지(三國志)』 고구려전에는 “그 나라 백성들은 노래하고 춤추기를 좋아해서 나라 안 모든 마을에서는 밤만 되면 남녀 여럿이 모여 서로 노래하고 논다. 또 나라 동쪽에 수혈(隧穴)이라는 큰 굴이 있는데 매년 10월이 되면 수혈신을 맞아 동쪽 굴 위로 와서 제사를 지낸다. 신은 나무로 만든 신좌(神座) 위에 모셔진다.”라고 하였다.
고구려와 마찬가지로 예(濊)도 10월이면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데 이 때가 되면 밤낮으로 술마시고 노래하고 춤추어 이것을 무천(舞天)이라 하였다. 또 사당을 지어 범을 제사지내어 이것을 신으로 여겼다.
『후한서』 동이전 한(韓)의 마한조(馬韓條)에는 5월이 되어 밭갈이가 끝나면 귀신에게 제사드리고 밤낮으로 술마시고 놀면서 여럿이 모여 춤추고 노래하는데 한 사람이 춤을 추면 수십 명이 따라서 춤춘다고 하였다. 10월이 되어 농사일이 끝나면 다시 이와 같이 놀았다고 되어 있다.
중국의 고대문헌들 가운데 『양서(梁書)』는 잘 노는 조선의 백성을 기자(箕子)의 감화를 받은 때문이라 하여 노는 것마저 중국과 연결시킨다. 그래서 노래하고 춤추는 기물(器物)들이 오히려 예악(禮樂)의 기풍이 있다고 하였다.
노래와 춤이 단순히 노는 수단이 아니라 정화(淨化)의 방법일 수도 있는 것이다. 예악의 근원이 동양에 있어서는 원래 음외(淫猥)와 음방(淫放)한 마음, 사특하고 더러운 기운으로부터 몸을 지키게 하는 데 있었다. 춤추고 노래하는 것이 바로 난장판일 수만은 없다.
『예기』에 보면 음악은 즐기는 것이며 즐거워할 때는 성음(聲音)을 발하여 노래가 되고 동정으로 나타나 춤이 된다는 것이다. 성음과 동정으로 표현되는 가무는 사물에 감동하여 발동한 성정(性情)이 변화한 것으로서, 그 변화는 가무 두 가지가 전부이다.
그래서 올바른 방향을 잡는 것이 중요하다. 춤추는 사람이 장내를 돌 때 음악이 연주되어 진퇴를 합일하게 하면 행렬이 바를 수 있고 보는 사람들도 이것에 의해 진퇴를 정제(整齊)한다고 보았다.
노래와 춤은 화락(和樂)의 표시이며 훈화(薰化)의 도구가 된다. 그렇게 보면 잔치에 필수적인 춤과 노래가 이미 예악의 시작이라 할 수 있다.
제의의 춤과 노래는 난장판의 현상이라기보다 윤리도덕의 발생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풀이된다. 예악의 범절은 윤리도덕의 실천항목이고 자연과 본능에 대한 질서짓기이다.
고대사회의 주술적 사고방식은 절대적인 초월적 권능을 인정한다. 신비한 힘에 대한 금기(타부)의 관념은 하느님 · 신령 · 조상신을 상정하고 그 권능을 빌리기 위해 제물을 바치고 손을 비비고 절을 하고 그것도 삼배구배(三拜九拜)하고 일정한 주문을 외우는 형식을 밟는다. 그런 절차가 의식의 시작이다. 의식이 곧 예의 기원이다.
주술적 · 종교적 의례 행위는 그 대상이 두 가지로 나누어진다. 인간의 상상력으로 만들어진 초자연적 존재인 신령 · 동물 · 영혼 등과 조상 · 문화영웅 · 권력자 등 신격화된 인간적 존재에 따라 만들어지는 의례의 형식이 그것이다.
형식은 저마다 다르지만 근본적으로는 강한 사람에 대한 외경심이 신비적 대상으로 옮겨지는 것이다. 신성의 존재에 대한 작용이 사람에게도 응용되는 과정이 거듭되면서, 의례가 점차 세련되어갔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신비한 초월적 힘에 대한 의례가 종교적인 것이라면 인간에 대한 의례는 세속적 · 사회적인 것이다. 그러나 그 두 가지는 서로 발전과정에서 교류하면서 역사적 산물로서 제의절차라는 형식으로 확정된다.
인간은 상호관계 속에서 조직적인 집단뿐만 아니라 사회적 규범이나 도덕적 가치를 형성한다. 그것을 사회관습이라고 하며 그런 사회생활규범이 불문율로서 사회의 중심세력, 이른바 국가권력에 의해 법률적 규범이 되는 것이다. 그것을 질서라고 한다.
사회적 관습이 종교적 · 정치적 행사와 결합되면 그 행사의 인상을 강조하기 위해 형식 · 규정 · 절차 · 의물의 구비 등이 정비되고 세련되는 것이 보통이다. 그런 세속적 질서는 자유로운 삶의 형식에 대해서는 부담스런 짐이 된다.
고대사회의 영고 · 동맹 · 무천 등은 그런 관습적 질서에서 벗어나려는 자유로운 삶의 꿈틀거림이자 고천제의(告天祭儀)의 엄숙한 형식 다음의 풀어헤쳐진 축제의 난장판에 대한 기록이다.
하늘에 대한, 초자연적 신비한 힘에 대한 범신론적 관념이 동식물과 자연의 모든 사물에 영혼이 깃들이게 하고 해와 달과 별과 바람과 비와 구름에 초월적인 신성한 존재를 연상하게 만든다.
관념은 이른바 풍요의 띠라고 하는 달과 물과 식물과 여성의 환대(環帶)를 이루게 한다. 그런 자연의 존재는 기울고 차는, 죽음과 재생 · 부활을 체현하고 있다. 결국 죽음의 조락과 재생의 생명력을 상징하는 풍요의 띠는 계절의 고비에 풍요제의(豊饒祭儀)의 굿과 잔치로 확립되고 그것이 고조선(古朝鮮)의 제천행사(祭天行事)가 되었던 것이다.
그것은 천지창조의 개벽신화(開闢神話)가 ‘본’이 된다. 처음 하늘이 열리고 땅이 치솟는 개벽신화는 어둠과 혼돈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 어둠과 혼돈은 빛과 생명을 간직한 것이기 때문에 그 무질서는 창조적 어둔이라 일컬어진다.
그 어둠 속에서 빛이 생기고 질서가 생기고 인간이 생기면서 사회체계와 국가구조가 확립되어간다. 그 법과 질서는 자연스럽고 자유롭던 만물의 숨통을 조이는 것으로 관념된다.
그래서 주기적으로 한 번씩 태초의 창조적 무질서로 돌아가지 않으면 인간은 활력을 되찾을 수 없고 천지만물도 기운을 잃어서 제대로 생산할 수가 없다. 옛 사고방식은 제의를 빌려 신화를 재현하고 태초의 혼돈과 어둠으로, 그 창조적 무질서로 되돌아간다.
근원에서, 태초의 시간에서, 신성이 강림하는 공간에서 굿이 벌어지고 잔치가 벌어져 먹고 마시고 노래하고 춤추며 곤드레만드레의 난장판이 벌어지면 거기에 신성이 강림하는 근원이 마련된다. 그 창조적 무질서 속에서 잃어버렸던 활력과 생명력이 되살아나서 세계는 가득해지고 풍요와 다산이 확실해진다.
천지개벽의 근원으로 돌아가 난장판의 무질서 속에서 새로운 질서와 생산을 기대하는 것이 제의의 기원이다. 하늘에 빌고 한 번씩 마음대로 난장판을 벌인다. 그래서 고전제의의 굿판은 신성에 대한 경건한 예배와 함께 즐거운 축제의 난장판이 있게 마련이다.
고대사회의 제천행사 흔적이 남아 있는 마을굿이나 별신굿의 제의절차는 부정(不淨)거리 · 영신(迎神)거리 · 가무오신(歌舞娛神) · 뒷전거리로 이루어진다.
온전한 굿은 12거리 내지는 24거리 등으로 구성되는데 ‘거리’ 하나하나가 이상과 같은 네 단계로 구성된다. 또 굿의 진행과정도 크게 보면 이상과 같은 네 단계로 편성되어 있다.
노래하고 춤추는 대목은 신성을 즐겁게 하다가 결국은 인간공동체의 즐거움이 된다. 뒷전거리에서는 신성에 바쳤던 경건성을 풀어헤쳐 마음껏 무질서를 구가하는 형식을 취한다. 질서에 눌리다가 그 질서를 깨뜨리고 난장판에서 심적 긴장을 풀어내고 다시 질서의 일상생활로 돌아오는 셈이다.
이런 사회적 기제는 계절의 고비, 일년의 시작이라든가 씨앗을 뿌리는 계절, 추수기 등에 계절제의가 되었다가 오늘날 이른바 세시풍습의 민속행사로 남게 되었다.
계절제의 혹은 월력제의(月歷祭儀)의 고비는 정초 · 봄 · 가을이다. 해가 바뀌고 새해를 맞는 동지, 연종방포(年終放砲), 제석구나(除夕驅儺), 경신수야(庚申守夜) 등이 새로운 질서의 전제인 혼돈의 상징이다. 거기에는 묵은 것을 버리고 새것을 받아들이는 대립과 갈등, 고도의 불안과 긴장이 수반된다.
또 새로운 해와 계절에 좋은 결과를 미리 모방하여 다산(多産)과 풍요를 만들어내어 소기의 목적을 이룩하려는 주술심리는 점복(占卜) 형식의 겨루기, 이른바 양파경축희(兩派競逐戱)라는 겨루기놀이를 만들어내어 제의와 축제의 잔치분위기를 더 높인다.
영고 · 동맹 · 무천 등 고대의 제의는 신라의 가배(嘉俳)에서 그리고 팔관회(八關會) · 연등회(燃燈會) 등에서 변형된 흔적을 남긴다.
우리 나라 문헌에서 처음으로 가무백희(歌舞百戱)라는 표현이 나타나는 것은 『삼국사기』의 신라 유리이사금(儒理尼師今) 9년(32), 이른바 가윗날의 유래에 대한 기록이다.
“임금이 6부를 정한 뒤에 이를 두 패로 나누어 왕녀 둘로 하여금 각각 부내의 여자를 거느리게 하여 편을 만들어 7월 16일부터 날마다 대부(大部)의 뜰에 모여 길쌈을 하였다. 밤늦게야 일을 파하고 8월 15일에 이르러 그 공의 다소를 살펴 진 편에서 음식을 마련하여 이긴 편에게 사례하고 모두 노래와 춤과 온갖 놀이를 하였다. 이를 가위라 한다.” 이기고 지는 놀이형식의 길쌈두레는 근년까지 남아 있던 세시행사의 풍요제의적 잔존형식이었다.
고려의 속절(俗節)이었던 원정(元正) · 상원(上元) · 상기(上己) · 한식 · 단오 · 추석 · 중구(重九) · 동지 · 팔관(八關) 등 아홉 명절도 계절제의와 연관되어 있다.
나중에는 2월 연등(燃燈)으로 바뀌었지만 상원에 행하던 연등회가 불사(佛事)에 대한 잔치라면, 겨울에 행하던 팔관회는 토속신에게 제사지내는 것이다.
대상은 달라도 등불을 밝히고 채붕(綵棚)을 설치하고 술 · 떡 · 과일을 마련, 음악과 가무백희로 큰 잔치를 베풀어 부처님과 천지신명을 즐겁게 하는 이 행사들은 국가적 제전이었다. 그 내력은 역시 계절적 고비, 신년과 봄 · 가을의 이른바 재생과 죽음의 고대신앙이 변형된 형식으로 전승된 것이다.
국가체제도 풍요제의의 신앙을 제도화한다. 팔관회나 연등회 등이 그것이다. 신앙심은 쇠퇴해서 사라졌지만 형식은 남아서 조선조에 들어오면 국가적인 큰 잔치는 왕실의 진연(進宴) · 진찬(進饌) · 진작(進爵) 형식으로 남는다. 민간차원에서는 별신굿 동제(洞祭)에서 그 명맥을 유지한다.
세시행사로 남은 계절제의는 집단형식을 취한다. 고대의 고천제의를 수용한 고을단위 · 부족단위의 큰 잔치는 국가적 제도로서, 봉건사회에서는 왕실 · 궁정의 공식행사가 되었다. 왕가의 탄신 · 하례 · 취임식 등의 경사잔치 외에도 외국사신맞이의 환영잔치로 발전한다.
이런 잔치 모습은 오늘날에 있어서는 각종 기념축전 · 국제대회 등 국가단위의 큰 잔치로 변모하였다. 이른바 관주도형 축제들이 세시풍습이 변형된 현대적 잔치라면 옛모습 그대로 남아 있는 것이 향토축제 같은 것이었다.
향토축제는 일제 식민지 아래서 일종의 미신행위로 탄압되고 말살되었다. 그것은 향토축제가 지역주민들의 애향심을 불러일으키고, 내 고장에 대한 역사의식을 고취시키기 때문이다. 즉, 주민들의 단결과 단합 및 공동체의식을 더 높이는 계기가 되는 것을 두려워한 식민통치자들의 음흉한 술책에 의한 것이다.
그러나 광복이 되고 1960년대와 1970년대에 들어 국제화에 따른 주체의식이 고조되고 함께 전통문화의 핵심으로서의 향토축제에 관심이 모이자 그 연원과 부활에 대한 재구성 논의가 활발해졌다.
마을단위 혹은 지역단위의 축제는 대체로 문화제니 예술제니 해서 운동경기나 전시회 · 발표회를 겸한 미숙한 형식으로 부활되었다. 최근에 이르러 그 지역주민들의 참여에 의한 향토성과 역사성 및 주민의 주체성이 강조되면서 축제의 중심에 굿의 옛 제의성(祭儀性)이 되살아나기 시작하였다.
그리하여 지방문화제 이름으로 행주대첩제(幸州大捷祭)를 비롯해 단종제(端宗祭) · 백제문화제 · 전라예술제 · 남도문화제 · 신라문화제 · 개천예술제 등 40개의 지역별 큰 잔치들이 민속행사 속에 잠재된 풍요제의적의 흔적과 함께 현대적인 체육대회 · 서예전 · 백일장 등을 곁들여 치르고 있다.
한편 강릉 단오제, 밀양 아리랑제, 제주도 영등 약마희(躍馬戱) 등 지역별로 열두개의 대표적 향토축제가 타당성 여부를 검증받고 있다(1986년 현재).
향토축제가 동제의 발전된 형태임이 확실하고 마을굿이 고천제의의 잔존형식이라고 한다면 동제나 몇 개의 마을이 어울려 몇 년 만에 시행하는 별신제(別神祭)는 지역공동체가살아남은 마을잔치이다.
마을굿은 제의와 놀이가 그대로 투영되어 있다. 부락제니 마을굿이라고 불리는 동제는 성역인 서낭당(당집) 중심으로 벌어진다.
성역에는 왼새끼가 둘러쳐지고 황토(붉은 주토)가 깔려지며 죽음과 여성에 관한 것은 부정한 것으로 금기된다. 이른바 금색이 철저해서 제주(祭主)는 부인과 별거상태에 들어가고 한겨울에도 목욕재계를 해야 한다.
제기가 새로 마련되고 제수 마련에도 금기가 따른다. 제주의 생기복덕을 가리듯이 제수물품 구입에 따른 금기와 생선 · 고기 등의 선정, 술을 빚는 장소라든가 떡쌀의 됫수, 우물의 정화, 제수진설 절차 및 숫자 · 방위 · 시간 등에 대한 금기가 그것이다.
이것은 도(禱) · 새신(賽神) · 걸립 · 유가(遊街)가 수반되는 마을굿과 상치되는 것처럼 보일 정도로 철저한 세속성의 닫힘이자 배제가 된다.
흔히 열두거리의 굿으로 이루어지는 별신굿의 새신도 부정거리 · 영신공수 · 뒷전거리로 금기에 의한 신성의 드러남을 강조한다. 열두거리에 의한 영신(迎神)으로 굿이 벌어지는 장소는 만신(萬神)의 신전이 된다.
신이 계시는 태초의 시간과 공간의 신화적 세계에 참여하는 신앙공동체 구성원들은 그들의 종교적 의지를 무당이라는 신의 대리자가 보여주는 가무 속에 집약시킨다. 그것은 신앙공동체의 큰 잔치이다.
부정과 재앙을 멀리하고 신들의 본향에서 깨끗해진 제의판이 놀이판으로 옮겨앉으며 신성일변도의 제의절차 속에 에로스의 몸짓이 두드러진다. 양반놀이같이 상전과 머슴의 역할이 뒤바뀌며 권위가 희롱당하는 파계승놀이가 연출되면서 신전인 자리는 광대들의 웃음판이 된다.
일상생활의 규범에서 벗어나는 이러한 일탈(逸脫)이 제도적으로 보장되는 것이 잔치의 기능이다. 제의의 굿에서 놀이의 굿으로 바뀌는 그 중추적 핵심이 바로 잔치라는 제도이다.
민간 제례 대상으로의 동제의 시행일자는 대개 정월이 주가 되고, 봄의 단오, 백중, 추석을 중심한 상달이 위주가 된다. 그것은 제의가 대체로 해가 바뀌고 계절이 바뀌는 절기에 이루어진다는 뜻이다.
마을굿은 마을의 신수(神樹) 아래에서 강신(降神)굿이 벌이는데, 신대를 쥐고 앉은 제주 주위를 무당이 축문을 외우면서 가무를 한다. 대개 강신은 신대의 흔들림으로 전달된다. 신성의 내림은 새로운 해의 시작, 계절적 고비의 재생을 신격화한 것이다.
3월삭(朔)에 강림한 단군, 임인(壬寅) 3월 계욕제(禊浴祭)날에 탄생하는 수로왕 등은 신성의 탄생과 신춘계절을 더욱 봄답게, 계절의 고비답게 불양(祓禳), 부정을 털어낸다.
지난 겨울 동안의 묵은 더러움, 질서로 인해 무거워지고 쇠퇴한 시간을 새롭게 탄생시키는 계절제의는 신성의 강림과 나란히 있다. 그리하여 묵은 시공이 사라지고 새로운 생명의 시공, 신성한 시공이 마련된다. 극도의 조심스런 몸가짐은 제의집행자만이 아니라 마을공동체 전체의 금기이다. 그것은 다음에 펼쳐질 난장판의 폭발과 상관된다.
동제의 마을잔치는 영신 다음의 가무오신 조항이 단순한 가무만이 아니라 동서양진으로 대립된 놀이형식의 겨루기로 이루어지는 경우도 있다. 광대놀이가 수반되기도 해서 송신(送神)의 뒷전거리, 제의적 난장판을 이루어 성의 범람, 상하관계의 뒤집힘, 반란모티프들이 부각된다.
탈춤에서 흔히 보는 성적인 묘사들, 즉 할미와 첩 사이의 갈등, 소무(小巫)의 노장유혹, 취발이의 걸찍한 대사 등과 양반에 대한 말뚝이 · 취발이 · 쇠뚝이의 엇나감 등은 제의의 잔치판에서 벌어지는 축제적 측면이 극화(劇化)된 것이다.
잔치가 계절 · 월력제의의 기본 구조였을 때만 해도 그것은 집단적 잔치로, 마을공동체 전체의 축제였으며 대동놀이였다. 그러다가 그 집단성은 권력계층의 상징인 왕실 · 궁중제의로 제도화되었다. 그 계층 안에서 왕위권자(王位權者)의 인생제의(人生祭儀)인 통과의례로 옮겨져 시유화된 것이다.
집단잔치가 개인 혹은 사제(私制)잔치로 옮겨앉기도 했다. 왕실 경사로서의 탄신 · 하례 · 왕위취임식 등이 공적인 계절제의의 집단적 축제와 습합되어 권력자의 인생제의가 계절제의의 제도적 행사를 대신하게 되었다.
마침내 문화영웅 같은 건국신화와 무조(巫祖) · 조상신화가 계절제의적 천지창조 개벽신화의 작은 모형이 된 것이다. 그 모형은 지배계층을 거쳐 민중계층의 사적 영역에서 탄생, 결혼 같은 통과의례의 잔치판을 펼치게 한다.
원래 제의가 삶의 불안 · 위기 · 시련을 이겨내는 인간심리의 메커니즘이라면 잔치는 심리적 긴장을 해소하는 한판의 놀이라고 할 수 있다. 이에 반해 계절제의의 잔치는 마을의 지역공동체적 대동놀이에서 그 원형을 간직한다.
세시풍습에 보면 송구영신의 신년하례는 엄숙한 제의적인 형식과 함께 술 · 떡 · 덕담과 편전(便戰)에 의한 겨루기의 점복형식으로 잔치분위기를 고조한다.
세배는 집안의 어른, 사회의 어른, 조정에서의 임금에 대한 세배이며 임금의 세배는 천지일원을 예배하는 풍요축년(豊饒祝年)의 제의적 기원을 갖는다.
오늘날 남아 있는 의식과 품물 가운데도 옛 제전의 흔적이 더러 있다. 따라서 신년에 깨끗한 흰떡과 국으로써 절식(節食)을 하는 것은, 신성의 존재에 바친 음식의 공동회식을 뜻한다. 말하자면 신에게 바친 깨끗한 음식을 신사(神事) 후에 나누어 먹음으로써 신성의 능력에 참가하고 신성의 혜택을 입어 벽사진경(辟邪進慶)하는 주술적 의식의 흔적이다.
그런 고대 사고방식이 음복(飮福)이나 덕담에도 남아 있다. 축수나 덕담은 결과가 이루어지기를 비는 기도나 축원과 달리 벌써 그렇게 되었다는 경축의 뜻을 전달하는 것이다.
겨루기 · 편전의 석전 · 윷놀이 · 줄다리기[曳戰] 등도 제의 · 잔치 · 축제의 여흥적 현상 저편에 태초의 창조적 혼돈으로 되돌아가서 난장판을 통해 획득된 재생활력의 근거를 대는 것이다. 동시에 그런 제의적 겨루기를 통한 풍년과 다산의 잠재적 소망의 실현의지도 숨어 있는 것이다.
제의의 철저한 금기지키기와 부정거리의 시행과 맞물려 나가는 마을잔치의 음주가무와 난장판은 무질서와 혼돈 다음의 새 질서의 탄생을 기약하는 연극형태이다. 그것이 천지창조의 개벽신화를 재현한다는 사실은 이제 거의 망각되었다.
그러나 그런 계절제의가 우리의 삶으로 옮겨와서 삶의 제의가 되면 통과의례라는 이름의 제의와 잔치를 꾸미게 된다. 통과의례는 계절제의의 인간화라고 할 수 있다.
개벽신화시대로 거슬러 올라가 태초의 생명력과 활력을 되찾아 다산과 풍요를 기약하며 바뀌는 절기의 불안과 위기의식을 달래는 제의양식이 인간의 삶의 고비에 원용되는 것이 통과의례가 된다. 그리하여 탄생과 입사식(入社式) 혹은 관례 · 약혼식 · 혼인 · 장례 같은 것이 계절의 고비처럼 삶의 고비로 매듭지어지는 것이다.
『삼국유사』에 나오는 수로왕과 허비(許妣)의 혼사는 가락국의 시조를 사모하는 희락행사(戱樂行事), 말하자면 국민적 제전이자 큰 잔치였다. 그것은 어쩌면 집단적 대동놀이이자 풍요제의의 섹스 모델이 왕가로 수렴되는 극화 방식일 수도 있는 것이다.
7월 29일 가락의 백성들과 벼슬아치들은 유천(留天) · 신귀(神鬼) 등이 처음 허비 오는 곳을 바라보았던 승첩(乘帖)에 올라가 유막(帷幕)을 치고 술과 음식으로 환호하며 옛적에 유천 · 신귀 등이 허후(許后) 오는 것을 바라보고 급히 임금에게 고했던 유사(遺事)를 재현한다.
이들은 동서편에 서로 눈짓하고 건장한 사람들이 좌우로 나뉘어 망산(望山)섬에서 용맹한 말굽으로 육지를 달리고, 뱃머리는 서로 물 위에 밀리어 북으로 고포(古浦)를 향해 다투어 나아간다.
이 행사는 수로왕과 허비가 처음 만났을 때의 결혼의식을 다시 연극적으로 재연한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그 신혼(神婚)으로 백성과 나라에 새로운 활력을 초래하게 하고, 하늘과 땅 혹은 물의 결합, 봄과 대지의 결합으로 번영과 풍요와 다산을 가능하게 한 혼인잔치의 의식을 볼 수도 있다. 그 가운데 술과 음식, 동서좌우의 말달리기와 뱃놀이의 겨루기가 잔치분위기를 더욱 고조시켰을 것임은 쉬이 짐작할 수 있다.
하늘의 관념, 신성의 존재가 인간 사회의 시조나 임금의 형태로 제정일치 양상을 보이다가 왕정이 수립되면 풍요제의 계절제의도 세시행사로 정착된다. 또한 왕가의 통과의례가 차츰 일반화된다. 삶의 제례인 통과의례에서 가장 큰 비중을 가지는 것은 출산 · 탄생이다. 그것도 왕가의 법도가 전형이 될 것이다.
궁중예식에는 비(妃)나 빈(嬪)에게 산후(産候)가 있으면 담당 제조(提調)가 산전에 들어가 조치를 취한다. 우선 그 달에 길한 방향에 짚 · 백교석(白絞席) · 양털담요 · 기름종이 · 백마가죽 · 가는 돗자리 등을 순서대로 겹겹이 놓아 산좌(産座)를 마련한다.
아기가 태어난 지 사흘이면 탕병회(湯餠會)를 열고 친척들이 모여서 서로 경하하는 옛 풍습은 중국의 것이라고 한다. 하지만 이레 되는 날마다 수수떡을 많이 만들어서 앞뒷문 앞에 놓고 길 가는 사람에게 나누어주며 ‘인부심’하는 민속은 왕가나 부잣집 풍습이었다. 세이레(21일째) 되는 날이면 산실의 모든 금기가 철폐되어 모든 친척들이 모여들어 아기에게 선물도 주고 공적인 축하인사를 한다.
백일잔치는 대규모로 벌어진다. 유아의 사망률이 높았던 옛날에는 백일이 어려운 고비를 넘긴 주술적 숫자관념과 연결되어 있었다. 탄생 일주년의 첫돌잔치는 아기를 위해서나 집안을 위해서나 큰 경사가 아닐 수 없다. 아기는 포목필로 쌓은 자리에 앉히고 그 앞에는 돌상이 놓인다.
돌상에는 쌀과 떡과 과일, 그리고 국수 · 실 등을 비롯해 미래를 점치는 돈 · 활 · 화살 · 책 · 종이 · 붓 · 먹(딸일 경우는 활 대신 가위 · 자 · 바늘) 등이 놓인다.
일반적으로 쌀이나 돈은 부자를 의미하고 실 · 국수 등은 장수, 활은 장군, 붓은 필명을 날린다는 뜻으로 해석된다. 돌잡히는 잔치는 여흥과 같은 것이며, 돌상의 물건을 마음대로 집게 해서 성격을 시험하고 미래를 점치는 행사는 시아(試兒) · 시주(試周)라고 한다.
어린이가 자라서 어른이 되었다는 사실을 상징하는 의례를 성년식 혹은 관례라 하였다. 고려 광종 16년 2월 왕자에게 원복(元服)을 가하여 태자로 삼았다는 기록이 나온다.
조선조에 들어오면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의 가례편(嘉禮篇)에 왕세자 관의(冠儀)와 문무관(文武官) 관의가 있어 왕가와 양반계층에서 관례가 행해졌음을 알 수 있다.
관례 의식은 성년식 · 입사식과 마찬가지로 어른이 되어 기존사회 속으로 들어오는 공적인 승인양식이다. 그러나 그 결사(結社)에 따른 내용이 없어진 사회에서는 순전히 삼가례(三加禮) 같은 형식적인 절차만이 중요해진다. 더구나 그것이 가지는 경제적 부담이 커짐에 따라 혼인식에 앞서는 약혼식으로 대치될 수밖에 없다.
원래 관례는 초가(初加)에서 쪽찌고 관 쓰고 심의(深衣)를 입는다. 재가(再加)에서는 관건(冠巾)을 벗고 사모를 쓰고 심의 대신 조삼에 가죽띠를 띠고 계혜를 신는다. 마지막 절차인 삼가(三加)에서는 복두를 쓰고 난삼에 띠를 두르고 신을 신는다.
절차마다 주례인 빈(嬪)이 축사를 낭독한다. 삼가례가 끝나면 사당에 가서 고하고 어른들에게 인사한다. 이 입사식 관례는 육체적 · 정신적 위기인 사춘기의 통과의례이다. 무속(巫俗)의 입무식(入巫式)도 이에 해당된다.
샤먼들의 입무식에는 결사의 흔적이 있고, 정신적 · 육체적 위기는 신병(神病)으로 나타난다. 환각 · 환시 · 환청에 시달리는 가운데 큰 무당한테서 내림굿을 해받는다.
신딸 · 신모(神母) 관계가 형성되면 몸주인 수호신을 분명히 하면서 작두를 타는 등 신위(神威)를 보이는 입무식에서는 예언능력을 보임으로써 무계(巫系)에 들어감을 분명히 한다.
이른바 ‘이니시에이션’이라고 하는 입무식 · 입사식과 관례가 아주 달라 보이는 것은 관례의 ‘이니시에이션’이 갖는 결사형식과 내용이 없어졌기 때문이다. 현대에 오면 만 18세나 20세에 국가나 공공단체들이 베푸는 18년기념식 같은 행사가 옛 맥락을 잇고 있다.
관례가 약혼식과 융합되었다면 약혼식 자체가 혼인식의 전제가 됨으로써 혼인식이 성년잔치의 핵심이 된다고 해야 할 것이다. 혼례의 잔치는 탄생의 위기, 장례의 숙연함에 비해 훨씬 개방적이다. 따라서 같은 통과의례 가운데도 계절제의와 가장 닮은 인생제의로서 엄숙한 질서와 무질서한 난장이 어우러진다.
혼례는 혼의(婚議) · 납채(納采) · 납폐(納幣) · 친영(親迎)의 절차에 따라 행해진다. 납채는 사주와 택일의 알림, 혹은 약혼식으로 대신하고, 납폐도 ‘함진애비’의 채단값 받아내기의 장난소동 정도로 약식화되었다.
전통적인 혼례에서는 친영이 가장 중요하고 복잡한 행사이다. 사모관대를 한 신랑과 족두리 혹은 화관을 쓰고 원삼을 입은 신부가 기러기 조각을 바치는 전안청(奠雁廳)에서 상견례를 올리고 합환의 술을 마신다.
상견례는 가운데 큰 상을 마주하여 신랑은 서쪽에서 동향으로 서고 신부는 동쪽에서 서향으로 선다. 합환주는 청실홍실을 드리운 것이다.
신식 혼인식에서는 ‘웨딩드레스’를 입은 신부와 양복을 입은 신랑이 주례 앞에서 상견례를 올리고 혼인반지를 교환하며 서약을 하는 것으로 하객 앞에 그들의 결연을 공개한다.
엄숙한 절차는 형식에 따른 것이고, 혼속(婚俗) 가운데 폐백 털어먹기와 신방지키기, 신랑달기 등은 옛 풍습이고, 신혼여행은 최신 형식이다.
혼례의 난장은 폐백털기와 신랑달기의 민속에 남아 있다. 신랑집에서 신부집에 보내는 선물인 납징(納徵)을 두고 장난꾸러기 신랑친구들이 폐백값을 받아내기 위해서 신부집 대문 앞에서 야료를 부려 돈을 받아낸다. 술과 음식을 대접받고 물러나는 이 귀여운 행패는 떠들썩한 혼례의 광고이다.
혼인 후 신랑신부가 한방에서 사흘밤을 지내는데 이를 신방이라 한다. 그런데 이 신방을 신부집의 여러 여인들이 문틈으로 엿본다. 원래 신방에서의 돌발사고를 미리 막기 위한 신방지키기는 혼례축제에 따르는 장난이 되어버렸다. 그 중 극심한 형태가 신랑신부다루기 민속이다.
이것은 신랑이 신부집에 갔을 때 동년배 무리들이 신랑을 거꾸로 매달아 그 발바닥을 때리며 남의 딸을 훔쳐간 죄를 문책하는 장난이다.
이 장난은 신랑신부를 묶고, 음담패설로 신부를 곤혹스럽게 하며, 심하면 신랑신부를 바늘로 찌르고 신발을 벗기기도 했던 중국 혼속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아니면 신부약탈혼례의 흔적이거나 그 문화적 수용에 따른 대상 심리의 표출일 수도 있다.
이러한 모든 잔치가 결국은 인간사회의 제도적 질서 속에 베풀어지는 무질서의 순치(馴致)인 것만은 확실하다. 계절제의의 세시행사에 대입시키는 인생제의의 통과의례로써 천지개벽의 창조신화를 시조전승 건국신화로 구체화시킨 인간의 지혜는 제의를 축제로 탈바꿈시킴으로써 자연의 리듬과 삶의 리듬을 일치시키려고 했다.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 잔치이다. 크고 작은 잔치는 지역공동체의 대규모 집단축제이자 ‘나’라는 개인단위의 소규모축제로 축소된다. 그것은 잔치를 베푸는 주체와 그것을 받는 대상의 관계를 설정한다.
한 마을이나 한 부족국가가 바치는 집단적 제의와 축제는 신성한 존재로서의 하느님이나 조령(祖靈)이나 정령(精靈)에 대한 한마을 공동체 그 집단의 안강(安康)과 다산 · 풍요에 대한 보증으로서의 제물바침이다. 또는 초월적 존재의 위계질서를 상징하는 하나의 체계정립일 수도 있다.
그것은 국가체계로 수렴되어 제천행사 · 팔관회 · 연등제 · 진연(進宴) · 나례(儺禮) · 산대도감극으로 전개되었다. 현대에 이르러서는 각종 기념행사와 수상축하파티, 국제대회의 개막잔치 · 폐막축제 등으로 변모, 공식화되었다. 다른 한편으로는 지방 민간단위의 향토축제 · 군민체육대회, 위안 · 경로잔치, 문화 · 예술제로 전개된다.
성별로 나이별로 화전놀이 · 물놀이 · 꽃놀이로 혹은 동인형식의 시회(詩會), 동료의 승진이나 전 · 부임에 따르는 환영 · 환송잔치로 혹은 회사기관별 단합대회 · 야유회 그리고 대학의 축제 등으로 잔치 · 축제의 개념은 확대되고 있다.
그것은 생활환경의 변화에 따라 변모한다. 경제적 여유에 따른 삶의 화려한 채색이 잔치 · 축제에 반영된다. 또한 산업화사회의 기계화 · 도시화에 따른 인간소외 현상을 극복하기 위해 공동체의식에 대한 회귀본능이 전통사회의 잔치의 제의와 난장, 질서와 무질서 및 새 질서에의 활성적 참여를 회상하게 한다.
계절 · 풍요제의가 농경사회의 생업과 성장의 주기(周期) 속에서 신년 · 단오 · 한가위와 같은 월력순환과 우리와 선조, 음과 양, 주변과 중심, 삶과 죽음이라는 이원적 상징의 체계로 대응한다는 것은 쉽게 긍정할 수 있다.
계절제의의 집단적 공동잔치에 대응하는 인생제의가 소규모단위의 집단과 개인의 통과의례로 구체화되는 가운데 제의는 세 가지 상태를 명시한다.
옛 상태에서 분리 또는 새 상태로 도입하는 의례와, 낡음과 새 것으로 이행하는 데 있어서 두 차원에 귀속되지 않는 상태로 두는 이행상태 혹은 변경기(邊境期) 의례, 그리고 새로운 상태에의 결합 · 편입 혹은 옛 상태에의 복귀의례가 그것이다.
이 분리 · 도입의례를 세속성에서 성화(聖化)에 이르는 의례, 이행 · 변경의례를 경계(境界)에 있는 상태 혹은 신성에 드는 상태라 하고 편입 · 복귀의 의례를 탈성화(脫聖化)의 의례라고 규정한 사람은 리치(Leach, E. R.)이다.
이러한 추이(推移)에는 그 장면에 대응해서 특징적인 인간행위가 표출된다. 그것들은 성화(聖化)의식에서 형식성을, 신성한 상태에서 역할의 뒤바뀜, 탈성화의식에서 난장판의 놀이로 대응된다.
그럴 때 그 형식성은 일상생활의 사회질서를 극도로 상징하고 역할의 전도는 그 질서를 역전시켜 상징하고 난장판은 그 사회질서를 용해시키는 형태를 상징하는 것이다.
잔치에 있어서 서두에 해당되며 겉으로 드러나는 형식성과, 창조적 무질서의 난장판이 잔치의 상보적인 대립요소이다. 사회질서를 역전시키는 잔치의 강조부분이, 말하자면 잔치의 드라마라는 사실을 특기하고 넘어갈 만하다. 잔치는 그런 의미에서 드라마이다. 그 극적 구조는 문학형식으로 기록된다.
그리하여 우리는 수많은 잔치와 놀이의 문학화를 문헌에서 보게 된다. “황금가면을 쓴 바로 그 사람/방울채 손에 쥐고 귀신을 쫓네/잦은몰이 느린 가락 고운 춤사위는/바야흐로 봉황새가 봄을 노니듯.”(崔致遠의 鄕樂雜詠五首 중 大面)
우리의 전통음악 가운데 오랜 역사 속에서 잔치와 밀접한 관계를 맺고서 발전된 것이 바로 풍류라는 음악문화이다. 잔치는 사람들이 모여 살면서 삶의 즐거움을 일정한 의식을 통해 나타내는 방식의 하나였다.
삶의 즐거움을 나타내는 잔치에는 술과 음식 그리고 손님의 초대와 더불어 노래와 춤을 포함한 풍류가 필수적으로 수반되었다. 조선시대 왕을 중심으로 한 궁중잔치에는 반드시 풍류가 따랐다. 그런 궁중의 풍류는 장악원의 악공에 의해서 연주되었다.
궁중 밖, 부유층의 양반귀족들을 위한 잔치에도 풍류가 따랐다. 민간에서의 풍류는 창우(倡優) · 재인(才人) · 광대와 같은 직업적인 연예인들에 의해서 제공되었다.
이러한 잔치문화의 한 갈래로 나타난 풍류라는 음악문화 이외에 조선 후기에 이르러 새로운 형태의 풍류가 주로 지식과 재부를 겸했던 중인층에 의해 시회(詩會) 같은 모임에서 발전되었다.
조선 후기의 새 풍류는 음악사와 문학사를 새로운 방향으로 전개시키는 데 중요한 구실을 하였다. 궁중잔치와 관련된 풍류는 흔히 연례악(宴禮樂)이라고 문헌에 기록되었다. 반면 민간의 잔치에서 연주된 노래와 춤, 음악을 우리는 흔히 풍류라고 부른다.
그러나 오늘의 전통음악에서 일컫는 풍류는 조선 후기 중인출신 문인들의 시회와 관련된 특수 갈래의 음악문화인 정악(正樂)을 뜻하는 말로 사용되고 있다. 먼저 풍류의 개념에 관한 개괄이 있어야 하겠고 이어서 궁중잔치의 풍류와 민간에서의 풍류에 대한 개괄이 따라야겠다.
풍류라는 명사는 두 가지 각도에서 개념화시킬 수 있다. 하나는 음악을 포함한 예술과 관련된 관점에서 살피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음악과 직접적으로 관련된 관점에서 개념화를 시도해보는 것이다.
보통사람들이 쉽게 접근하기 어려운 예술에 재능을 타고난 사람들은 평소의 삶 속에서 느끼는 감정을 여러 수단으로 운치있게 표현하였다. 그러한 예술활동을 담당하던 사람을 예전에는 풍류객이라고 하였다.
또한 그림이나 글씨에 뛰어난 재주꾼을 묵객(墨客)이라 하고, 시를 잘 짓는 사람을 시객(詩客)이라고 불렀다. 시를 노래로 잘 부른 예술가를 가객(歌客)이라 하고, 음률에 정통한 이를 율객(律客)이라 불렀다. 거문고를 잘 타는 사람은 금객(琴客)이라 하였다.
조선 후기 백성들의 삶을 소재로 그린 풍속화의 대가 김홍도(金弘道)나 신윤복(申潤福)은 모두 뛰어난 묵객이었다. 김삿갓으로 유명한 김병연(金炳淵)은 팔도를 유람하면서 많은 풍자시를 읊었던 시객의 대표적인 인물이었다.
『청구영언』의 저자 김천택(金天澤)과 『해동가요』를 지은 김수장(金壽長)은 당시 유명했던 가객들이었다. 김천택과 단짝으로 풍류활동을 벌였던 거문고의 명인 김성기(金聖器)는 금객으로 유명하였다.
이렇듯 다양한 예술활동을 통해 우리 예술사의 발전에 공헌했던 여러 가객 · 금객 · 율객 · 시객 · 묵객들을 총괄적으로 개념화한 용어가 바로 풍류객이라는 말이다. 풍류라는 말을 이러한 각도에서 조명해볼 때, 예사의 삶을 벗어나 멋스러운 풍치가 있고 운치스럽게 벌이는 예술활동을 일반적 의미의 풍류라고 규정지을 수 있다.
오늘날 풍치가 있고 운치스럽거나 멋지게 놀 줄 아는 이를 풍류를 아는 사람이라고 한다든지, 세상사에는 이치가 밝으나 낭만이 없는 사람을 풍류의 멋을 모르는 사람이라고 일컫는 것도 모두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된다.
음악과 직접 관련하여 풍류의 개념을 파악하려면, 풍류라는 말이 쓰인 용례에서 그 개념을 찾아야 한다. 대풍류 · 줄풍류 · 사관풍류라는 용어에 쓰인 풍류는 악곡명이고, 풍류가야금 또는 향제풍류(鄕制風流)나 풍류다스름 따위의 낱말은 음악과 관계된 특수용어들이다.
이 모든 용어 속의 풍류라는 말은 조선 후기의 지식인들이 모여 시를 노래하고 음률을 즐겼던 풍류방(風流房)의 음악문화와의 관련 속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조선 후기 경제적으로 부유한 중인층의 음악애호가들에 의해서 발전된 풍류방의 음악문화는 기악과 성악으로 구별될 수 있다. 전통음악 중에서 기악과 성악을 싸잡아서 정악이라고 부르는 갈래가 바로 풍류방의 음악문화이다.
정악의 기악곡 중에서 대표적인 악곡이 「영산회상(靈山會相)」이고, 가곡(歌曲)은 정악의 대표적인 성악곡이다. 「영산회상」이라는 관현악곡은 악기편성에 따라서 여러 명칭으로 불렸다.
즉, 줄풍류라는 곡명은 거문고를 중심으로 악기를 편성하여 연주한 「영산회상」, 즉 현악영산회상(일명 거문고회상)의 우리식 이름이다. 젓대나 피리 중심의 「영산회상」, 즉 관악영산회상의 우리식 악곡명은 대풍류이다.
사관풍류는 가곡의 반주곡을 향피리 중심으로 악기를 편성하여 연주한 기악곡에 붙인 악곡명이다. 이러한 관현합주의 기악곡들이 모두 풍류방에서의 중요한 연주곡목들이었기 때문에, 풍류라는 말이 악곡명으로 사용되었던 것이다.
향제풍류란 서울의 풍류방이 아닌 지방의 풍류방에서 연주했던 「영산회상」을 의미한다. 풍류다스름이라는 곡명은 향제풍류의 연주에 앞서 연주되었던 전주곡 형태의 다스름을 일컫는다.
풍류가야금은 풍류방에서 가곡 반주나 「영산회상」 연주에 사용되었던 가야금이다. 그 명칭은 민속악의 산조를 연주하던 산조가야금과 구별하기 위해 붙인 이름이다.
이렇게 음악적 관점에서 풍류의 개념을 조명해보면, 조선 후기 부유층의 지식인들이 풍류방에서 즐기던 음악문화 중에서 관현합주의 특별한 기악곡을 의미하던 말이 풍류였음을 알 수 있다.
‘풍류 한바탕을 즐깁시다.’라는 말은 「영산회상」 전곡을 함께 감상하자는 뜻으로 풀이된다. ‘향제풍류는 서울 것과 다르다.’는 말은 지방에서 연주되는 「영산회상」의 곡명이나 음악적 특징이 서울 것과 구분된다는 의미로 이해하면 된다.
보통 연향(宴享)이라고 문헌에 기록된 궁중잔치는 여러 궁중의식 때에 화려하고 웅장하게 베풀어졌다. 예컨대 왕이나 왕비의 생일을 축하할 때, 외국사신을 위로할 때, 원자의 탄생이나 왕세자의 책봉을 기념할 때, 동짓날이나 정초 때 등이다.
이런 궁중잔치에서 노래와 춤 그리고 음악이 장악원의 악공 · 여기(女妓) · 무동(舞童) · 가동(歌童)들에 의해서 제공되었다. 조선 초기 궁중잔치에 따른 풍류의 화려함은 『악학궤범』에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 조선 후기의 풍류활동은 『진연의궤(進宴儀軌)』 · 『진찬의궤(進饌儀軌)』 · 『진작의궤(進爵儀軌)』에 자세하게 전한다.
궁중잔치에서는 향악정재(鄕樂呈才)와 당악정재 등 당악(唐樂)과 향악이 연주되었다. 세종연간(1418∼1450)의 회례연(會禮宴) 등가에 악공 60명이 참가하였고, 헌가에 139명의 악공이 절차에 따라서 음악을 연주하였다. 한편 악생 100명이 문무(文舞)와 무무(武舞)를 추었다.
성종연간(1469∼1494)에 정전(正殿)에서 베푼 진풍정(進豊亭)에 참석한 장악원의 악사는 3명, 여기는 100명, 악공은 60명이었다. 궁중잔치 때 악공과 여기들이 펼친 웅장한 풍류는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이후에는 규모가 작아졌지만, 조선 후기까지 전승되었다.
특히 순조연간(1801∼1834)에 새 향악정재와 당악정재가 많이 창제됨으로써 조선 전기의 화려하던 궁중잔치의 풍류를 어느 정도 복구할 수 있었다.
현재까지 연주되고 있는 「춘앵전(春鶯囀)」 · 「무고(舞鼓)」 · 「가인전목단(佳人剪牧丹)」 · 「장생보연지무(長生寶宴之舞)」 등의 정제는 순조 때 재연되었던 것을 국립국악원에서 전승한 궁중무용들이다.
「보허자(步虛子)」 · 「낙양춘(洛陽春)」 · 「여민락(與民樂)」 · 「만(慢)」 · 「본령(本令)」 · 「해령(解令)」 같은 악곡들은 궁중잔치에서 정재의 반주음악이나 관현합주로 연주되던 곡명들이다.
궁중 밖 민간에서의 풍류는 두 가지 각도에서 조명될 수 있다. 하나는 어떤 경우를 축하하는 잔치에서 직업적인 연예인들을 불러다가 풍류를 즐기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본인들이 직접 풍류방에 참석하여 노래를 부르거나 악기를 연주하면서 즐기는 풍류활동이다.
직업적인 재인이나 광대를 불러서 풍류를 즐기던 조선시대 사회계층은 주로 경제적으로 부유한 지식층들이었다. 이런 종류의 풍류가 제공된 경우는 과거급제를 축하하는 유가(遊街)와 홍패고사(紅牌告祀)를 지낼 때였다. 또는 과거 합격 후 처음으로 관직을 얻었을 때나 지방관아에서 활동할 때였다.
문과나 무과의 과거에 급제한 사람이 임금에게 받은 어사화를 관모에 꽂고 광대를 거느리고 풍악을 잡히면서 서울의 거리를 돌며 일가친척을 찾아다니는 일을 유가라고 하고, 보통 3일 동안 계속되었다.
3일유가를 마치면 광대들과 함께 고향에 돌아가 부모와 동네어른들을 모신 가운데 급제자가 받은 홍패를 모시고 일생의 만사형통을 비는 고사를 지내는데, 이런 의식을 홍패고사라고 한다.
유가나 홍패고사에서 광대들은 풍악을 제공하여 잔치분위기를 높여주었다. 이런 유가의 모습은 서울대학교 박물관 소장의 「평생도(平生圖)」에 잘 그려져 있다.
조선 후기 가난한 선비 송만재(宋晩載)의 아들이 급제하자 유가나 홍패고사 대신 아버지가 「관우희(觀優戱)」라는 한시를 아들에게 지어 축하해 주었다. 「관우희」에 의하면 광대들이 그런 잔치에서 판소리 열두마당을 불렀음이 확인된다.
성현(成俔)의 『용재총화』에 의하면 과거급제자가 처음으로 관직을 얻어 구관들에게 잔치를 베푸는 일을 허참(許參)이라 하였다. 또한 다시 50일을 지나서 잔치를 베푸는 일을 면신(免新)이라 한다고 기록되어 있다.
허참이나 면신을 위한 잔치에는 광대들과 기녀들이 필수적으로 따랐고 밤새도록 술과 노래 그리고 춤을 포함한 기악(妓樂)의 풍류를 즐겼다. 성종 때만 해도 새벽녘 잔치를 끝낼 때 참석자들은 「한림별곡(翰林別曲)」을 불렀다고 『용재총화』에 기록되어 있다. 이런 잔치에서의 풍류가 조선 후기 「한양가(漢陽歌)」에 다음과 같이 자세히 묘사되어 있다.
“화려한 거문고는 안족(雁足)을 옮겨놓고/문무현(文武絃) 다스리니 농현(弄絃)소리 더욱 좋다/한만(閑漫)한 저 다스림 길고 길고 구슬프다/피리는 춤을 받고 해금은 송진 긁고/장고는 굴레 죄어 더덕을 크게 치니/관현의 좋은 소리 심신이 황홀하다/거상조(擧床調) 내린 후에 소리하는 어린 기생/한 손으로 머리 받고 아미(娥眉)를 반쯤 숙여/우조(羽調)라 계면(界面)이며 춘면곡(春眠曲) 처사가(處士歌)며/어부사(漁父詞) 상사별곡(相思別曲) 황계타령(黃鷄打令) 매화타령/잡가 시조 듣기 좋다/춤추는 기생들은 머리에 수건(手巾) 매고/웃영산[上靈山] 늦은 춤에 중영산(中靈山) 춤을 몰아/잔영산 일춤 추니 무산선녀(巫山仙女) 내려온다.”
조선 후기 부유한 중인출신 가객과 금객들은 풍류방에 모여서 스스로 「영산회상」을 연주하고 관현반주에 맞추어 가곡을 불렀다. 이들에 의한 풍류방의 음악문화가 바로 전통음악의 한 갈래인 정악이었다.
정악의 성악 갈래에 드는 가곡을 즐겨 부르던 대표적인 풍류방은 김천택 · 김수장을 중심으로 탁주환(卓柱環) · 박상건(朴尙健) · 김우규(金友奎) 등의 가객들로 구성된 경정산가단(敬亭山歌壇)이었다.
김천택의 『청구영언』, 김수장의 『해동가요』, 박효관(朴孝寬)과 안민영(安珉英)의 『가곡원류』는 모두 그러한 풍류방에서 즐겨 부르던 가곡의 사설을 모아놓은 노래책들이다.
정악의 기악 갈래에 드는 줄풍류 · 대풍류 · 사관풍류 또는 「미환입」 · 「세환입」 등의 기악곡 및 가곡의 뿌리인 「만대엽(慢大葉)」 · 「중대엽」 · 「삭대엽」들도 금객들에 의해서 풍류방에서 연주되었던 악곡들이다.
이런 기악곡과 성악곡을 담은 대표적인 고악보로 이득윤(李得胤)의 『현금동문유기(玄琴東文類記)』, 신성(申晟)의 『금보신증가령(琴譜新證假令)』, 김성기의 『어은보(漁隱譜)』, 서유구(徐有榘)의 『유예지(遊藝志)』, 윤용구(尹用求)의 『현금오음통론(玄琴五音統論)』 등이 있다. 조선 후기 한양에서 풍류방의 멋진 광경이 「한양가」에 이렇게 묘사되어 있다.
“금객(琴客) 가객(歌客) 모였구나/거문고에 임종철(林宗哲)이/노래에 양사길(梁四吉)이/계면(界面)에 공득이(孔得伊)며/오동복판(梧桐腹板) 거문고는/줄 골라 세워 놓고/치장(治裝) 차린 새 양금(洋琴)은/떠난 나비 앉혔구나/생황(笙篁) 통소(洞簫) 죽장고(竹杖鼓)며/피리 저 해금(奚琴)이며/새로 가린 큰 장구를/청서피(靑鼠皮) 새 굴레에/홍융사(紅絨沙) 용두머리/단단히 죄어 매고/태극(太極) 그린 큰 북가에/쌍룡(雙龍)을 그렸구나.”
상대의 동맹 · 영고 · 무천 등의 제천의식이 끝나면 연등회나 팔관회에서나 마찬가지로 가무와 백희의 잔치가 벌어졌던 것으로 보인다. 이런 잔치에서 장소를 마련하는 별도의 설비가 있었느냐의 여부는 알 수 없다.
제천을 위해 단을 모으고 주변을 엄숙하게 했다면 잔치만을 위한 설치는 아니라 해도 분위기는 이미 조성되었다고 할 수 있다. 다만 장소 전체에 망라되는 것은 아니었다고 보인다.
고구려 고분벽화에 백희에 해당되는 줄타기 · 죽마타기 · 땅재주넘기 · 씨름 · 택견 등의 놀이가 보이는데 주변에 특별한 설비가 없다. 이와 같은 놀이의 경우는 지금도 마찬가지여서 별다른 치장을 하지 않는다.
조선에서도 마찬가지여서 유숙(劉淑, 1827∼1873)이 그렸다는 「대쾌도(大快圖)」(서울대학교 박물관 소장)에도 성벽 밖에 적절한 터를 잡고 놀고 있는 장면만이 묘사되어 있다.
팔관회나 연등회 때의 궁중에서는 임금이 하례를 받고 대소 신료들과 외국 사신들과 더불어 잔치를 베풀었다. 역시 가무와 백희가 연희되었다. 임금이 임어(臨御)하게 되면 외부와 차단하기 위한 장막을 둘러치는 게 보통이었다.
장막 위로는 차장(遮帳)이라는 차일막을 친다. 이는 고구려때부터의 관습이었다. 고구려에서는 차장 · 장막(또는 帷幕)이 크게 발전해서 고분벽화에 자주 보인다.
차일과 장막은 조선시대까지 계승되어 궁중에서 행하는 잔치에 사용되었다. 법전(法殿)에 잔칫상이 마련되면 임금은 남향하고 좌정한다. 처마 아래로는 마당까지 구름 같은 차일을 친다.
상하의 월대(月臺)에는 두 겹의 장막을 두른다. 상대에는 아름다운 비단장막을 치고 하대에는 그보다 격이 낮은 헝겊으로 장막을 만들어 친다. 상대의 장막 안이 무대가 되어 가무와 백희가 연희되고 하대장막에는 악공들이 있어 풍악을 아뢴다. 휴식처나 개복청도 여기에 준비된다.
이 때의 대소신료(大小臣僚)들은 대하의 마당에 큼직한 초석(草席)을 깔고 동서반으로 나누어 벼슬에 따라 열석한다. 북향하고 제각기 잔칫상을 받는다. 잔치장소로는 최고급의 시설이다. 이 방식은 삼국시대 · 신라통일기 · 고려시대에도 마찬가지였으리라고 추정된다.
국립중앙박물관의 「진연반차도(進宴班次圖)」에서 조선시대의 화려한 잔치장소 설비의 실상을 볼 수 있다. 「인정전진하도(仁政殿進賀圖)」라는 이와 유사한 그림이 창덕궁에도 있다.
이런 설비는 백성들 사이에서도 행해졌다. 화려한 비단장막은 구하기 어려우므로 병풍을 둘러쳐 대신하기도 한다. 김홍도가 그린 「기로세련도(耆老世聯圖)」에서 조선시대의 마련을 볼 수 있다.
임금이 친림하면서도 잔치자리를 간결하게 마련하는 수도 있다. 궁궐에서 떠났을 때는 대부분 그렇다. 청계천 준천공사장에 나타나 호궤를 하는 장면을 그린 「어전준천도(御前濬川圖)」(부산시립박물관 소장)에서 차일을 치고 초석을 깔아 호궤의 장소를 마련한 간결한 준비를 볼 수 있다. 잔치에 참여한 귀인들은 당상(堂上)에 오르고 가무 · 백희꾼들은 마당에서 연희하도록 꾸미기도 한다.
이 방식도 상대로부터 전래된 것으로 보인다. 김진여(金振汝) 등 다섯 화가가 그린 「경현당사연도(景賢堂賜宴圖)」 중 「기사사연도(耆社私宴圖)」에서 볼 수 있듯이 당상에서는 귀인들이 잔칫상을 받고 열좌했는데, 당하에서는 구경꾼들이 보는 중에 여럿이 어울려 「처용무(處容舞)」를 추고 있다.
당상을 잔치장소로 지정할 때에 대청 등이 좁으면 마루 끝에서 따로 판자를 잇대어 까는 보첨(補詹)을 한다. 좁은 곳을 넓게 쓰려는 마련인데 이 보첨의 모습을 김홍도가 그린 「담와(淡窩)」, 홍계희(洪啓禧)의 「평생도(平生圖)」(국립중앙박물관 소장)에서 볼 수 있다. 여섯폭째가 홍계희의 회갑연 장면인데 상을 받은 마루에 잇대어 보첨한 구조가 묘사되어 있다.
잔치장소에 학을 박제한 것이나 분이나 병에 꽂은 꽃이나 용선 · 투호 등의 놀이기구나 기치장검의 의장기물들이 장식되어 위엄을 갖추기도 한다. 안중식(安仲植)이 1883년에 그린 「한일통상조약기념연회도」(숭실대학교 한국기독교박물관 소장)는 큰 테이블에 남녀 열두 명이 의자를 놓고 둘러앉아 서양 음식을 즐기는 잔치장면이 매우 이색적이다. 개화 이래 전례없는 잔치풍습으로 보이는데 이를 위해 어떤 설비를 준비했는지는 알 수가 없다.
배를 타고 잔치를 하는 경우도 있다. 수군들이 승전했을 때 베푸는 승전연(勝戰宴)이 일례이다. 또 하나는 관리들이나 백성들이 배를 타고 노는 선유가 그것이다.
고려 의종이 호수를 만들고 배를 띄워 즐겼다거나 연산군이 경회루 연당에 배를 띄우고 즐겼다는 유형인데 정작 어떤 마련이 있었는지는 알 수 없다.
단지 김홍도가 그렸다는 「평양감사선유도」(국립중앙박물관 소장)가 있어 판옥선(板屋船)에 새로운 치장이 있었을 것으로 짐작될 뿐이다. 신윤복이 그린 「한량들의 선유도」로 보아도 특별한 시설은 따로 준비되지 않았던 것 같다.
사람이 평생을 사는 동안에는 여러 가지 의례를 시행하고 참가한다. 출생하여 성장하고 생을 마칠 때까지 지나는 몇 고비의 의례는 한 고비를 끝내는 종(終)인 동시에 다음 고비를 맞이하는 시작의 의미가 깊다.
여러 의례에는 각기 규범화된 의식이 있고, 각 의식에는 음식이 따르며, 각 의례음식에는 의례의 의미를 상징하는 특별양식이 있다. 잔치음식은 일상식과는 구성과 양식을 전혀 달리한다.
일상식은 밥과 반찬으로 구성한 주 · 부식 분리형이지만 잔치음식은 대체로 떡 · 과일 · 유과류 · 적 등을 모두 동격의 것으로 차린다. 이 중 대표적이고 보편적인 음식은 떡이다. 이러한 잔치음식은 조선 500년의 역사 속에서 조리가공법, 상차림의 양식, 여러 의례의 관행 등에서 전통을 확립하였다.
특히 왕실을 중심한 음식차림은 당시의 음식문화의 한 집체라고 할 수 있다. 즉, 진상이나 공상제도를 통해 각처의 명물식품이 모아지고, 이것으로 엄격하면서도 풍부한 조리 · 가공법과 차림의 양식 등이 다듬어지게 된 것이다. 그 중 연회음식차림은 물량 · 기술 · 의례 등에서 가장 풍부하고 격식이 높은 것이었다.
잔치음식은 모두 고배상차림을 하였다. 가장 높았던 고배상은 1829년(순조 29) 2월에 순조 4순과 어극 30년을 축하하는 진찬에 차려진 2척2촌의 고배상이다.
고배상은 한국 연회상차림의 고유한 전통이다. 궁중에서뿐만 아니라 민가에서도 혼례 · 회갑연 · 희연 · 회혼 · 제례 등에서 실시하였다. 특히 축하연의 고배상을 ‘큰상’이라고 하며, 멀리 바라본다 하여 망상(望床)이라고도 한다.
큰상에 차리는 음식은 과정류 · 생과일 · 건과류 · 병이류 · 전과류 · 숙육 · 편육류 · 전유어류 · 건어물류 · 육포 · 어포류 · 적류 기타 여러 가지 음식을 잔치의 규모에 따라 3촌에서 2척2촌의 높이로 원통형으로 괴어 색상을 맞추어 2, 3열로 줄을 맞추어 배열한다. 주빈 앞으로는 그 자리에서 먹을 수 있는 장국상을 차린다.
같은 줄에 배열하는 음식은 모두 같은 높이로 하고 안전하고 정연하게 쌓아올린다. 원통형의 주변에다 ‘축(祝) · 복(福) · 수(壽)’ 등의 글자를 넣고 색상을 절도있게 조화시키면서 괴어 올린다.
괴는 음식은 계절 · 가풍 · 형편에 따라 일정하지는 않으나 잡과 · 유과 · 강정 · 다식 · 당속 · 생실과 · 건과 · 전과 · 편 · 어물 · 편육 · 전 · 초 · 적 등으로 괴는 높이는 근래에 와서는 임의로 적당하게 하나 재래에는 접시수와 함께 기수로 하였다. 고배상의 음식은 잔치 끝에 반기로서 축하객 · 대소가 · 이웃들에게 나누어주며 이러한 관습은 반복의 의미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