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병연은 조선 후기 ‘김삿갓’ 혹은 ‘김립(金笠)으로 널리 알려진 시인이다. 그의 집안은 홍경래의 난이 발발하였을 때, 조부였던 평안도 선천부사(宣川府使) 김익순(金益淳)이 반란군에 투항한 죄로 폐족(廢族)을 당하였다. 김병연은 삿갓을 쓰고 전국을 방랑하다가 생을 마감하였다. 그의 시 세계는 그가 방랑 이후 10년 동안 창작한 작품과 그 이후에 창작한 작품으로 구분된다. 방랑 이후 10년 동안 창작한 작품에서는 방랑 과정에서 느꼈던 고뇌와 좌절감이 드러나는 반면, 이후 작품에서는 풍자와 해학이 특징적인 면모를 보인다.
본관은 안동이고 서울 장동(壯洞) 출생이다. 자는 성심(性深), 호는 난고(蘭皐)이다.
김병연은 조선 후기 최대 벌열 가문이었던 장동 김문(壯洞金門)에서 태어났다. 하지만 김병연이 5세 되던 해인 1811년(순조11)에 홍경래의 난이 발발하자 그의 조부였던 평안도 선천부사(宣川府使) 김익순(金益淳)은 반란군에 투항하여 적극 협조한 죄로 능지처참형을 받고 집안은 폐족(廢族)을 당하게 된다. 김병연이 6세가 되던 1812년(순조12)에 집안이 폐족이 되자 그의 가족은 경기도와 황해도 등지로 흩어졌다. 이후 1816년(순조16)에 김병연은 모친과 함께 영월(寧越)로 거처를 옮겼고, 이곳에서 김병연은 장수 황씨와 결혼하여 그의 나이 18세가 되던 1824년(순조24)에 장자 김익균(金翯均)을 낳았다.
집안이 폐족 된 이후로 김병연의 부친은 남해로 유배를 갔다가 김병연의 나이 19세가 되던 해인 1825년(순조25)에 유배지에서 사망하였고, 이후 몇 년 사이에 김병연은 모친과 형제를 모두 잃게 되었다. 김병연은 다시 서울로 상경하여 이름과 출신을 속이고 서울의 유명 인사들과 교유하며 끊임없이 재기를 위해 노력하였지만 끝내 좌절할 수 밖에 없었다. 결국 김병연은 서울을 떠나 삿갓을 쓰고 금강산 쪽으로 방랑길을 떠나게 된다. 그는 금강산을 시작으로 충청도, 경상도, 전라도, 평안도 지역을 두루 방랑하였다. 고단한 방랑길에도 그는 집안을 재건하기 위해 지방 관아에 새로 부임한 관리와 친분을 맺고 벼슬을 구하고자 하였지만 노력은 수포로 돌아갔고, 1863년(철종14)에 57세의 나이로 전라도 화순에서 생을 마감하였다. 이후 아들 익균이 김병연의 유해를 거두어 강원도 영월군 의풍면 태백산 기슭에 묻었다.
김병연의 삶과 시작품에서 ‘시선(詩仙)’으로 일컬어진 이백(李白)의 기상이 느껴지는 점을 들어 김병연을 ‘시선(詩仙)’으로 일컫기도 한다. 그러나 김병연의 시작품에 투영된 작가 의식과 세계관은 속세를 초탈하여 절대 자유를 노래했던 시선(詩仙)과는 거리가 있다.
김병연의 시 세계는 방랑을 떠난 뒤 10년간 창작한 작품과 그 이후에 창작한 작품으로 구분할 수 있다. 김병연이 방랑길에 오른 뒤 10년간 창작한 작품에서는 그가 벌열 가문 출신이지만 방랑하며 걸식할 수 밖에 없었던 참담한 현실을 읊은 한스러운 심정과 비애, 고향과 가족에 대한 그리움, 폐족 된 집안을 다시 일으켜 유복한 가정을 재건하고 싶은 바람과 좌절 등 방랑하는 삶 속에서 느꼈던 고뇌와 좌절감이 여실히 드러난다. 방랑을 떠난 지 10년의 세월이 지난 이후에 창작한 작품에서는 고뇌와 좌절감으로 점철되었던 이전 작품들과는 달리, 풍자와 해학을 구사하고 양식적인 측면에서도 파격을 추구하는 면모가 드러난다. 이는 김병연이 지극히 힘든 방랑 생활에서 참혹한 현실을 마주하며 느낀 좌절감을 오히려 초탈함으로써 진정한 시선(詩仙)의 풍모가 드러난 결과로 보인다.
1941년에 그의 시작품을 엮어 편찬된 『김립시집(金笠詩集)』이 있다.
1978년에 김병연의 후손들이 주도해서 광주 무등산 기슭에 시비(詩碑)를 세웠다. 1987년에는 영월에 ‘전국시가비건립동호회(全國詩歌碑建立同好會)’에서 시비를 세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