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은 불교 삼보의 하나로 부처님이 가르친 진리를 가리킨다. 법(法)은 한자어로 물이 끊임없이 흘러가되 거기에는 일정한 길이 있음을 표시하고 있다. 석가모니는 원시 경전에서 “이 세상이 그렇게 되게끔 되어 있는 것, 그것이 법이다.”라고 하였다. 이는 세상에 존재하는 일체가 다 법이라고 할 수 있다. 곧 정신적인 것이건 물질적인 것이건 그 대상화되는 일체의 것이 모두 법이 된다는 말이다. 법의 실질적 내용은 불교의 필경의 교리들로 이루어져 있고 이를 교법(敎法)이라 한다. 법은 네 가지의 특질은 교법(敎法), 인(因), 덕(德), 무아성(無我性)이다.
범어로는 다르마(dharma) · 달마(達摩) 또는 담마(曇摩)로 음역한다. 다르마란 인도말은 불교에서 처음 사용한 말이 아니라 일찍이 인도 고대의 문헌인 『베다(veda)』 이래 브라만교의 여러 문헌들 속에서 사용되어 온 말이다.
그것은 다르(dhar)라는 동사어근(動詞語根)으로부터 파생한 말로서 ‘유지한다, 질서(秩序)지운다’ 등의 뜻이 있다. 따라서 다르마는 ‘∼을 유지하는 자, 질서지우는 자’ 등의 의미를 가진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석가모니는 원시경전(原始經典)에서 “내가 이 세상에 나타나기 전에도 법은 있었고 내가 죽은 후에도 법은 그대로 남아 있는 것이다.”라고 한 바 있고, 또 “이 세상이 그렇게 되게끔 되어 있는 것, 그것이 법이다.”라고 한 일이 있다.
그러므로 법을 어떤 쓰여진 교설(敎說)만 의미하는 것으로 생각하는 경향은 법의 의미의 일부분밖에는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 된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것, 일체가 하나하나 다 법이라고 불려질 수 있다. 그럴 경우 법은 하나의 대상 · 사물 · 실제 또는 개념 등의 뜻으로 해석된다. 정신적인 것이건 물질적인 것이건 그 대상화되는 일체의 것이 법이다.
불교에서는 인간 행위의 의지처로서의 법을 세우기도 한다. 석가모니의 최후 설법 가운데에는 “자기에게 의지하라. 법에 의지하라. 자기를 등불로 삼아라. 법을 등불로 삼아라.”라는 말이 있다. 즉 인간이 자신의 이법(理法)을 실천하는 곳에 참다운 자기가 구현된다고 생각하였던 것이다.
자기를 확립한다는 것은 다른 많은 사람들이 설하는 것 또는 어떤 권위자가 설하는 것에 맹종하지 않고, 일단 자기가 바르고 합리적이라는 판단을 내렸으면 그대로 실행하는 것을 말한다. 남의 가르침에 대하여 이의를 제기하면서까지 그와 같이 자기의 주장을 내세우는 데에는 반드시 근거가 있어야 하며, 남에게 확신을 갖도록 하는 이론적 근거가 되는 것이 다르마이다.
또한 불교에서는 실체적이거나 기능적인 ‘나’를 상징하는 데는 반대하였지만 대신에 무수히 많은 법을 인정하였다. 이러한 경우에 있어서의 법이란 우리들의 현실 존재로 하여금 ‘지금 이렇게 되어 있어야만 한다.’고 하는 규칙이다. 전통적인 설명에 따르면 법은 그 자체의 본질을 유지하면서 항상 규범이 되어 사물에 대한 이해를 발생시켜 준다[任持自性 軌生物解]고 한다.
또 법(法)은 한자어로 ‘물[水]이 간다[去]’는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 이 글자는 물이 끊임없이 흘러가되 거기에는 일정한 길이 있음을 표시하고 있다. 따라서 다르마를 법으로 번역한 것은 매우 적절한 것이었다.
실제로 현실의 존재 속에는 많은 법이 작용하고 있다. 그래서 구체적인 현실의 존재를 해명하기 위하여 불교에서는 오온(五蘊) · 육입(六入) · 육경(六境) 등의 여러 가지 법 체계를 설하게 되었다. 이 법이란 말은 매우 다양한 뜻을 내포하고 있는데, 특히 ‘인간 행위를 보존하는 것’이 그 본래의 뜻으로 사용되었다.
이 밖에도 인도에서는 ① 관례 · 습관 · 풍습 · 행위규범, ② 해야 할 일, 책임, 의무, 도리, ③ 사회질서 · 사회제도, ④ 착한 것, 선행, 덕, ⑤ 진리, 진실, 이법(理法), 보편적 의의가 있는 이치, ⑥ 전세계의 기반, ⑦ 종교적 의무, ⑧ 진리 인식의 규범, ⑨ 본질 · 본성 · 속성 · 성질 · 특질 · 특성 · 구성 요소, ⑩ 논리학의 술어, 빈사(賓辭) 등의 뜻으로 사용되고 있다. 불교에서는 위와 같은 용법들을 포함한 여러 가지 의미로 법이라는 말이 쓰이고 있다.
특히 소승불교의 교리에서는 “존재의 본질을 능히 파지(把持)할 수 있으므로 법이라 한다(能持自相 故名爲法).”고 해석되어 있다. 이 구절이 담고 있는 여러 가지 의미를 살펴보면 ① 진실한 이법(理法), 진리, 모든 사람이 언제 어디서나 지켜야 할 규율, 법도(法度), 법칙, 진실, 규범의 힘, ② 바른 일, 착한 행위, ③ 이법으로서의 연기(緣起), ④ 부처님의 가르침, 불법(佛法), ⑤ 삼보(三寶)의 하나, ⑥ 구체적인 계율의 뜻이 있다.
그리고 ⑦ 십이부경(十二部經), ⑧ 본성, ⑨ 형(型), ⑩ 뜻[意]의 대상, 육경의 하나, 마음속의 모든 생각, 생각의 대상이 되는 것, 마음의 대상, ⑪ 사물, 존재, 사물의 원형(原形), ⑫ 글자로 표현될 수 있는 의미, ⑬ 마음의 작용, ⑭ 실체, ⑮ 법신(法身), ⑯ 주어에 대한 술어, ⑰ 의(義), ⑱ 밀교(密敎)에서 행하는 기도 및 수행법이라는 뜻으로도 사용되고 있다.
이와 같이 법은 갖가지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데 그 어느 것이든지 진리 또는 이법(理法)이라는 것이 근본적인 의미로 깔려 있다. 인간의 개개 존재는 이처럼 수많은 다르마에 의하여 현상의 모습을 나타내기 때문에, 온갖 모습이 끊임없이 변화하면서 그 흐름이 연속되고 있다. 그러한 모습의 연속성을 유지시켜 주고 있는 것이 다수의 인(因)과 연(緣)이다. 이들이 나타내는 전체 집합에 의하여 자아의식이 성립되고 개별 존재의 연속성이 유지되는 것이다.
또한 대승불교의 가장 큰 특징 가운데 하나도 법에 대한 자각이다. 부파불교(部派佛敎) 철학으로 대표되는 법에 대한 객관적 해석과 이론적 분석태도를 지양하고 스스로의 체험과 실천을 통하여 주체적으로 감득하는 법에 대한 자각이 강조되었던 것이다. 원래부터 법이란 대상적으로 보기보다는 선정(禪定)의 체험을 통하여 자각해야만 하는 것이었다.
예컨대 원시경전도 “진지하게 명상하는 자에게 법이 나타났을 때 모든 의혹은 사라져 버린다.”고 단언하고 있다. 여기서 사라진다는 것은 지식이나 이론상의 의문이 아니라, 인생의 근본적인 의혹이 풀린다는 뜻이다. 따라서 깨달음이란 인간과 만물의 진실된 법을 꿰뚫은 경지에서 발견되는 것이었다.
법의 주체적 체험을 통하여 얻어지는 깨달음의 내용은 반야(般若)로서 강조되며, 이는 어디까지나 주객의 대립을 초월한 경지에서 감득할 수 있는 주체적 의식이기 때문에 이성과 지성의 세계에서 작용하는 지식과는 명확히 구별되는 것이다. 법의 실질적인 내용은 불교의 필경의 교리들로 이루어져 있고 이를 교법(敎法)이라 한다.
그 교법은 원시불교에서는 오온(五蘊) · 십이처(十二處) · 십팔계(十八界) · 삼법인(三法印) · 십이인연(十二因緣) · 사제(四諦) · 삼학(三學) · 삼십칠도품(三十七道品) · 사향사과(四向四果) 등으로 설해지고 있다.
대승불교에서는 육바라밀(六波羅蜜) · 보살십지(菩薩十地) 등의 수행계위(修行階位)와 불성(佛性) · 여래장(如來藏) · 팔식(八識) · 삼성(三性) · 이무아(二無我) · 보리심(菩提心) · 육입(六入) · 삼밀(三密) 등으로 설해진다. 이러한 교리를 수용하여 우리 나라에서는 종파별 · 사상별로 여러 가지의 새로운 교학으로 전개되어 갔다.
이 교법은 반드시 부처님에 의해 잘 설해지고, 관찰지(觀察智)에 의해 스스로 잘 살펴 보아야 하며, 어느 때에나 이에 의해 닦으면 증과(證果)가 있음은 물론, 직접 체험에 의해 실견실증(實見實證)되어야 하는 것이다. 또 이 교법은 사람들을 이상의 경지인 열반(涅槃)으로 이끌 뿐 아니라 관찰과 실수(實修)로써 바르게 각지(覺知)할 수 있는 것이라는 6가지 정의(定義)가 뒤따른다.
또 법은 네 가지의 특질을 갖추고 있는 것으로 설명되고 있다. 첫째는 교법(敎法)이고, 둘째는 인(因)이며, 셋째는 덕(德)이고, 넷째는 무아성(無我性)의 것이다. 첫번째의 교법이라는 것은 석가모니가 설한 가르침이고 팔만사천의 법문이라 불리는 것이다. 그것은 중생의 번뇌에 팔만사천 가지나 되는 많은 번뇌가 있기 때문에 그것을 퇴치하기 위해 팔만사천 가지의 법문이 설해졌다고 한다.
석가모니가 상대자에 따라 응병여약식(應病與藥式:병에 따라 약을 투여함)으로 임기응변(臨機應變)의 갖가지 설법을 한 것이 그것이다. 이러한 뜻에 있어서의 교법은 종교로서의 불교 본연의 모습을 나타내는 것이다. 즉 불교의 종교성이 교법의 이름으로 불리고 있으며, 그 이상(理想)은 깨침으로서의 성(聖)에 도달하는 것이다.
두번째의 인은 원인을 말한다. 인은 좁은 뜻으로는 불교의 이상으로서의 깨침에 도달하기 위한 원인[修道法]을 뜻하지만, 넓은 뜻으로는 모든 존재[現象]의 원인을 가리킨다. 그리고 원인은 결과와 관련되어 있기 때문에 인이란 말에 의해 바른 인과관계를 뜻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불교에서는 사회와 인생의 움직임으로서의 원인과 결과의 상태를 바르게 알고 인과의 도리에 따라 깨침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있어야 하는가’ 하는 이상실현의 방법을 바르게 알고, 그것에 따라 바르게 실천할 것을 주장하였다. 이처럼 ‘어떻게 있어야 하는가’, ‘어떻게 있는가’를 바르게 알고 실천하기 위해서는 거기에 바른 원인과 결과의 인과관계가 있어야 한다.
그것은 합리적인 진리를 갖는 인과관계를 뜻한다. 따라서 법의 두번째 정의로서의 인이란 바른 인과관계, 즉 합리적인 진리를 뜻한다. 다시 말하여 인의 본질은 보편타당적인 진리와 합리성에 있다고 할 수 있다. 법이 진여라든가 진리라고 불리는 것도 그 때문이다.
세번째의 정의인 덕(德)에도 성질이나 특성이란 뜻도 포함되어 있지만 여기서는 주로 종교적 윤리적인 선으로서의 덕을 뜻한다. 불교에서는 선을 상대선(相對善)과 절대선(絶對善)으로 분류한다. 상대선은 윤회전생(輪廻轉生)의 미혹의 세계에서의 선이며 업보에 지배를 받는 선이다. 선인선과(善因善果)의 인과법칙에 의해 선을 행하면 인간과 천상 등의 행복의 과보가 있다고 한다.
이에 대해 절대선은 이와 같은 인과응보를 초월한 것이며 성스러운 선을 가리킨다. 세속적 세계에서는 상대선이 권장되지만, 불교에서는 궁극적 목적으로서 상대적인 선악을 초월한 절대선을 추구하며, 이를 구현하려고 한다. 즉 법의 세번째 정의로서의 덕은 종교적 · 윤리적인 이상으로서의 선이고 정의이다.
불교의 교법이 높은 윤리성을 가지고 있으며, 사회 인륜의 질서를 어지럽히는 음사사교적(婬祠邪敎的)인 것을 배척하는 윤리적 종교라고 불리는 것도 법의 내용에 이와 같은 덕이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불교가 합리성과 윤리성을 가지고 어떠한 시대와 어떠한 지역, 그리고 어떠한 사람에게도 이상으로서 적용될 수 있는 보편타당성을 갖는 세계적 종교라는 것은 불교의 법에 이와 같은 세 가지의 규범적 특질이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첫번째의 법으로서의 교법은 두번째 법으로서의 합리성(眞)과 세번째 법으로서의 윤리성(善)을 포함함으로써 가장 뛰어난 교법이 된다. 불교의 법은 반드시 이와 같은 세 가지가 일체가 되어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법에 대한 네번째 정의로서의 무아성은 이 세 가지와는 다르다. 이 경우의 법이란 일체법(一切法) 또는 제법(諸法)이라 일컬어지는 경우의 법이며, 이것은 물(物)을 뜻한다. 이 중에는 선법(善法) · 불선법(不善法) · 정법(淨法) · 염법(染法) · 출세간법(出世間法) · 세간법(世間法) · 실법(實法)과 가정(假定) 등의 모든 것이 포함되어 있다.
이러한 존재나 현상을 무아성의 물(物)이라고 하는 까닭은 그 존재가 실체적인 물이 아니라 언제나 생멸변화하는 물이기 때문에 이를 고정불변한 물로서 집착하여서는 안 된다고 하는 실천면에 기초를 두고 있기 때문이다. 불교의 근본 목적은 무아무집착(無我無執着)의 바른 신앙실천에 있기 때문에 앞의 세 가지에 무아성을 합침으로써 완전한 법이 성립된다.
이 무아성은 다른 종교나 철학에서는 볼 수 없는 불교 특유의 것이며 불교의 특징을 가장 잘 나타낸 것이다. 이와 같은 법에 대한 정의는 우리 나라에서도 그대로 수용되고 토착화되었다. 교조의 권위가 절대적으로 인정되지 않는 불교적 교리 전통에 비추어 볼 때, 법의 중요성은 다른 종교보다 훨씬 강하게 인식되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