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산(西山)대사로 잘 알려진 청허 휴정(1520∼1604)은 태고(太古) 법통의 적전(嫡傳)을 잇는 조선시대를 대표하는 고승이다. 명종대에 승과에 급제한 후 선교 양종(禪敎兩宗)의 판사를 지냈고, 1592년 임진왜란 때 8도 도총섭(都摠攝)으로 의승군을 일으켰다. 지리산에서 출가한 후 금강산을 거쳐 묘향산 보현사(普賢寺)에서 활동하다가 입적하였다.
휴정은 청허계를 세운 사람으로서 사명 유정(四溟惟政, 1544∼1610), 편양 언기(鞭羊彦機, 1581∼1644) 등 많은 제자를 양성하였고, 간화선(看話禪)을 우위에 둔 선교(禪敎)의 수련을 주장하였다.
저술로는 문집인 『청허당집(淸虛堂集)』 외에 『선가귀감(禪家龜鑑)』, 『삼가귀감(三家龜鑑)』, 『운수단(雲水壇)』, 「심법요초(心法要抄)」, 「선교석(禪敎釋)」 등이 있다.
「선교결(禪敎訣)」은 630년(인조 8) 삭녕(朔寧, 현 경기도 연천군과 강원도 철원군 일대) 용복사(龍腹寺)에서 펴낸 『청허당집』 7권본의 제4권에 수록되어 있다. 또한 1642년(인조 20) 해남 대둔사(大芚寺) 개간본(「선교석」 합철본), 1666년(현종 7) 동리산 태안사(泰安寺)에서 개정된 『청허당집』 2권본의 하권, 발간년도 미상인 묘향산 장판(藏板) 『청허집』 4권본의 제4권에도 수록되어 있다.
청허 휴정은 ' 선(禪)과 교(敎)를 닦는 이들이 자신의 법만 고집하며 무엇이 옳은지 제대로 알지 못한다'고 진단하면서, '선은 부처의 마음이고 교는 부처의 말씀이며 양자는 근원적으로 다르지 않다'는 종밀(宗密) 이래 강조되었던 선교일치설을 먼저 언급했다. 이어 '교는 말이 있는 데서 말 없는 데 이르는 것이고, 선은 말 없는 데서 말 없는 데 이르는 것'이라고 하면서, '말 없는 데서 말 없는 데 이르는 것을 뭐라고 이름 붙일 수 없어 억지로 마음이라 한 것인데, 그 이유를 알지 못하고 배워서 알고 생각하여 얻으려 한다'고 비판한다. 또 '교 가운데 선이 있다고 하지만 그것은 선에 들어가는 입문이지 부처의 가르침을 널리 펴서 알리는 선지(禪旨)는 아니다'라고 말한다.
청허 휴정은 부처가 일생 동안 말씀하신 가르침을 자비의 그물에 비유하여 '작은 그물로는 소승(小乘)을 건지고, 중간 그물로 연각(緣覺)을 건지며, 큰 그물로는 대승(大乘)을 건져서 피안에 이르게 함'이 교의 순서라고 했다. 선에 대해서는 '중생에게 감로수(甘露水)를 내려 이익되게 하는 것이 교 밖에서 따로 전하는 조사가 남긴 뜻이며, 이는 세존이 진귀조사(眞歸祖師)에게 별도로 전해 받은 것'이라 설명했다. 그런데 부처의 가르침을 잘못 이은 자는 돈교(頓敎)와 점교(漸敎)를 선의 중심으로 삼거나 원돈교(圓頓敎)를 종파의 가르침으로 삼으려 한다고 지적하며, 부처의 마음을 직접 다른 사람의 마음에 전하는 교외별전(敎外別傳)의 방법을 널리 알려야 한다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지금 팔방의 승려들을 대함에 본분사인 경절문(徑截門)의 활구(活句)로 스스로 깨우침을 얻게 하는 것이 종사(宗師)로서 모범이 되는 것이다. 정맥(正脈)을 택하고 종안(宗眼)을 분명하게 하여 부처와 조사의 은혜를 저버리지 말라”라고 당부하는 것으로 끝을 맺는다.
당시 불교계가 선과 교로 나뉘어 갈등하던 상황에서 청허 휴정은 입문의 방법으로서 교의 가치를 인정하면서도 선의 우위를 주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