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실집사는 백제 출신으로 백제 멸망 후 일본에서 활동한 인물이다. 백제 부흥운동을 일으킨 귀실복신과 인척관계로 여겨진다. 달솔과 좌평을 지냈고 일본에서 소금하란 지위를 받고 학직두(學職頭)를 역임하기도 했다.
귀실집사가 죽은 연대는 귀실신사에 발견된 그의 묘지로 추정컨데 688년으로 여겨진다. 『신찬성씨록』에 의하면 귀실이라는 성은 귀신감화지의(鬼神感化之義)란 말에서 생겨났다고 하였다. 귀실은 복성으로 백제에는 사택씨나 흑치씨 등 복성이 많았다. 백제부흥군을 이끈 귀실복신(鬼室福信)과 의약에 통달했다고 알려진 귀실집신(鬼室集信) 등이 있다.
일본은 665년 백제 부흥운동이 실패한 후 왜국에 망명한 백제인에게 왜국의 관위를 주기 위해 백제국 관위의 계급을 검토하였는데, 귀실집사는 665년 일본으로부터 좌평 복신[귀실복신]의 공적에 의하여 소금하란 직위를 받았다. 그 전의 직위는 달솔이었다. 귀실복신의 공적으로 소금하를 받은 것을 볼 때 귀실집사가 귀실복신의 아들일 가능성도 있다. 귀실복신은 백제부흥운동기간에 실질적으로 백제를 대표하여 왜 왕권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 귀실복신은 663년 백제부흥운동의 또 다른 지도자인 풍장에 의해 죽었는데 아마 귀실집사도 그때 이후 일본으로 건너간 것 같다. 669년에는 좌평이란 직임을 띠고 있다. 일본은 669년 좌평 여자신(餘自信), 귀실집사 등 남녀 700여명을 근강군(近江國) 포생군(蒲生郡)에 옮겨 살게 하였다.
포생군에는 백제인들이 세운 석탑사와 백제사가 남아 있다. 665년에도 백제 남녀 4백여인을 근강군 신전군(神前郡)에 살게하였는데 망명한 백제인을 이용하여 새로운 도읍지 근강국을 개발하기 위한 조치로 보인다. 포생군은 신전군의 서남쪽에 위치하고 있다. 667년에는 귀족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근강국 대진경으로 천도하였다. 669년 귀실집사는 학직두를 맡고 다시 소금하의 관위를 받았다. 학직두는 율령제의 대학료(大學寮)의 장관에 해당하고, 현재의 국립대학 총장격이다. 율령제에서는 종5위상 혹은 종5위하의 사람이 임명되었다.
귀실집사의 후손들이 평안(平安)시대 후기부터 겸창(鎌倉)시대 후기에 세웠을 것으로 여겨지는 묘비가 현재 자하현 포생군 일야정시 소야(濨賀縣 蒲生郡 日野町市 小野)의 귀실신사[서궁신사(西宮神社)]에 남아 있다. 묘비는 윗부분이 삼각형 모양이고, 몸통은 8각형이다. 윗부분과 몸통과의 사이에 2㎝ 가량의 홈이 파여 있다. 전체 높이 48㎝, 한 면의 폭이 10㎝ 정도 된다. 비문의 내용은 정면에 ‘귀실집사묘’, 오른쪽에 ‘주조 3년(688) 11월 8일□’, 왼쪽에 '서손 미성이 만들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