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황사 석탑은 돌을 벽돌 모양으로 다듬어 제작한 탑이라서 모전석탑(模塼石塔)으로도 불리며, 현존하는 신라의 석탑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이다. 634년(선덕왕 3)에 석탑을 세웠으며, 현재는 3층만 남아 있다. 일제강점기인 1915년에 분황사 석탑을 해체·수리하는 과정에서 2층 탑신 중앙부에 있던 방형 석함(方形石函) 안에서 사리장엄구가 발견되었다. 당시 발굴보고서가 정식으로 발간되지 않았기 때문에 출토 현황에 대해 명확하게 파악하기 어렵지만 1916년 발간된 『조선고적도보(朝鮮古蹟圖譜)』의 사진과 도면을 통해 대략적인 모습을 파악할 수 있다.
사리장엄구의 외함은 방형 석함이며, 그 안에서 발견된 것으로 추정되는 유물은 녹유리병편, 은합, 원반형 수정, 곡옥, 수정, 유리, 금제귀걸이, 금제장신구, 금은제 바늘, 동제 가위, 침통, 조개껍질류, 금동제 장식편, 상평오수전 등 다양하다. 사리 봉안에 따른 장엄구와 각종 공양구로 구성되어 있다.
사리장엄구는 석함과 은합, 유리병 등 3중 구조로 추정된다. 석함은 장방형 몸체와 뚜껑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몸체 아랫부분은 자연석의 형태를 거의 다듬지 않았고 윗면은 뚜껑을 놓을 수 있도록 세심하게 가공하였다. 뚜껑은 네 모서리를 귀죽임한 지붕 모양으로 중국에서 녹정형(盝頂形)이라고 부르는 형태이다. 녹정형의 사리석함은 북위 연간에 출현하기 시작하여 수대(隋代)에 크게 유행하면서 사리장엄구의 외함으로 정착하였기 때문에 중국의 영향을 짐작할 수 있다. 은합은 납작한 원통형이며, 표면에는 장식이 없다. 내부에는 능직(綾織)으로 감싼 비정형의 구슬 모양 사리 5점이 봉안되어 있었다. 유리병은 파편으로 남아 있어 정확한 형태를 알 수 없지만 목이 다소 길고 몸체가 둥근 병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사리장엄구를 제외한 다른 유물은 사리 공양을 위해 봉안된 물품들이다. 매납된 공양물은 장신구나 패식이 다수를 차지하고 있어, 발원자인 선덕여왕과 연관된 것으로 추측된다. 발원자가 직접 착장하던 장신구나 소유하던 물품을 탑의 공양품으로 헌납하는 것은 인도에서 유래하였고 중국 남북조시대에도 널리 유행하였다. 따라서 곡옥이나 수정을 포함한 각종 구슬류, 귀걸이와 같은 장신구, 바늘과 바늘통, 가위, 족집게 등 다양한 유물의 성격을 발원자의 봉헌품이라는 측면에서 고찰할 필요가 있다. 유물 중에는 인도에서 유행한 귀걸이와 동남아시아 혹은 일본 남쪽 해안에서 산출되는 패각류가 포함되어 있어, 신라의 대외 교역에 관한 단서를 제공해 준다.
분황사 석탑 사리장엄구는 7세기 전반 신라의 불사리 신앙과 사리장엄 방식을 살펴볼 수 있는 중요한 자료이다. 또한 다양한 공양물을 통해 왕실의 공예 문화와 국제 교역의 성과를 고찰할 수 있는 점에서도 의의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