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기 높이 60㎝, 가로 100㎝, 세로 40㎝. 1979년 경상북도 유형문화재(현, 유형문화유산)로 지정되었다. 평면은 직사각형이며, 상대 · 중대 · 하대의 3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하대에는 복련(覆蓮), 중대에는 안상(眼象), 상대에는 앙련(仰蓮)을 새겼으나 파손이 심하여 원형을 확인하기 어렵다. 다만 일부 남은 연꽃 조각에서 고려 중기의 양식을 엿볼 수 있다.
상대 윗면에는 비석을 세웠던 직사각형 홈이 패어 있고, 홈 밖 윗면 일부에 김정희(金正喜)가 쓴 此和靜國師之碑趺[차화정국사지비부, 跡이라고도 읽음]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다. 1101년(고려 숙종 6) 8월 고승 원효의 덕을 추모하기 위하여 화정(和靜)이라는 시호를 내리고 이를 기념하기 위하여 그가 주석(駐錫)하였던 분황사에 추모비를 세우도록 명령하였는데, 막상 비석이 건립된 것은 무슨 이유에서인지 이로부터 70여 년이 지난 명종 때였다.
비석은 조선 전기까지는 남아 있었던 듯 『신증동국여지승람』 분황사조에는 “고려의 평장사(平章事) 한문준(韓文俊)이 찬술한 화쟁국사(和諍國師)의 비석이 있는데, 비석의 재료는 오금석(烏金石)이다.”라고 기록되어 있으며, 김시습(金時習)은 이 비석을 보고 「무쟁비(無諍碑)」라는 제목의 시를 남기기도 하였다.
그런데 비석 건립과 가까운 시기에 지어진 「최유청묘지명(崔惟淸墓誌銘)」에서는 「화쟁국사비명」을 최유청이 지었다고 밝히고 있는가 하면, 『금석청완(金石淸玩)』(1665년 간행)에는 비문의 글씨를 최선(崔詵)이 썼다고 하였다.
여기서 화정(和靜)은 숙종이 내린 시호요, 화쟁(和諍)은 원효사상의 핵심 개념이므로 구분하여 쓸 필요가 있으나 ‘화쟁국사’로 기록한 사료도 많아 현재까지 구분 없이 쓰이고 있다.
그러나 이 비석은 1597년(선조 30) 정유재란 때 분황사가 소실되면서 파괴된 듯하며, 이후 비석의 대좌만 남게 되었는데 조선 말기에 이곳을 찾은 추사 김정희의 고증으로 이것이 승 원효의 비석을 세웠던 비부임이 밝혀지게 되었다. 비문 일부가 탁본으로 『대동금석서(大東金石書)』에 실려 전하며, 1976년분황사 경내에서 발견된 비편(크기: 16㎝×14㎝)이 동국대학교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