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5년 보물로 지정되었다. 높이 5.4m. 현재 머리장식인 상륜부(相輪部)는 남아 있지 않고, 기단부(基壇部)와 탑신부(塔身部)의 여러 군데는 갈라지거나 떨어져 나간 상태이다. 하지만 건립 당시의 석재가 그대로 있어 원형은 추정할 수 있다.
석탑은 커다란 단층 받침돌 위에 장중(莊重)한 느낌을 주는 지붕돌을 갖춘 3층의 몸돌을 올려 놓아 안정된 비례감을 보이고 있다. 받침 부분은통일신라시대의 일반형 석탑이 대체로 2층의 받침을 구성하였던 것과는 달리 1층으로 되어 있다. 바닥돌을 쓰지 않고 바로 아래 받침돌을 놓았는데, 널돌 2장을 짜맞춘 것으로 지금은 1/3 가량 갈라져 있다. 그 위에는 4곳의 모서리 기둥을 각각 하나의 다른 돌로 세웠는데, 3층 몸돌과 지붕돌의 무게를 힘차고 안정감 있게 떠받치도록 굵게 다듬었다. 모서리 기둥 사이에는 하나의 돌을 끼워 면석으로 삼았다. 다만 한 면은 면석이 없고 막돌로 채워져 있지만, 원래 받침돌의 면석 전체는 8장의 돌로 짜임새 있게 구성되었을 것으로 보인다.이처럼 기둥과 면석을 각각 다른 돌로 만들어 일정한 수를 규칙으로 삼아 짜맞춘 방식은 백제시대에 건립된 부여 정림사지 오층석탑(국보, 1962년 지정)에서 시도되었던 것이어서, 이 석탑은 백제계 석탑이라고 할 수 있다. 덮개돌은 경사가 없는 평평한 2장의 돌로 구성하였는데, 밑면에는 1단의 부연(副椽)을 표현하였고, 윗면에는 2단의 굄을 두어 몸돌을 받치게 하였다.
1층 몸돌은 너비와 높이를 거의 같게 하여 받침돌과 비슷한 비례를 보이는데, 각 면마다 네모나게 판 감실(龕室)이 있다. 지붕돌은 두툼한 편으로, 경사가 가파르지만 처마 끝을 휘어 올리지는 않았다. 밑면에는 6단의 층급 받침이 새겨져 장중한 멋을 풍긴다. 2층 몸돌 이상은 1층에 비해 높이와 크기가 크게 축소되었지만, 전체적으로 안정된 느낌을 준다. 2층 지붕돌의 받침은 5단이고, 3층 지붕돌은 4단의 받침을 두었다. 각 지붕돌의 네 모퉁이에는 금식(金飾)을 한 것으로 보이는 작은 구멍이 있다.
이 석탑은 받침돌과 몸돌의 높이와 크기를 체감하여 안정된 비례감을 보이고, 층급받침의 수를 차례로 1단씩 줄였으며, 각 부분을 구성하면서 짜임새를 충분히 고려하였다. 이러한 점에서 고려시대에 건립된 우수한 석탑으로 평가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