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복궁 중건이 끝난 지 한 해 뒤인 1873년(고종 10)에 궁궐 안에서도 가장 깊숙한 자리에 창건되었다. 고종은 정부 대신들에게 알리지 않은 채 비밀리에 내탕금으로 건청궁을 짓다 공사 도중 문제가 되어 중지할 것을 요청받기도 하였다. 그러나 공사가 강행되어 여러 건물이 지어졌으며, 그 뒤 국왕과 왕비의 거처로 이용되거나 외교관 접대의 장소로 활용되었다.
1895년(고종 32) 을미사변 때 건청궁 곤녕합(坤寧閤)에서 명성황후가 일본인들에게 시해되어 한국 근세사의 비극을 상징하는 장소가 되었다. 일본인들이 경복궁 안에 있던 수많은 건물을 파괴되기 시작한 1909년에 건청궁도 함께 헐렸다. 광복 후인 1945년 11월 이 자리에는 국립민속박물관이 세워졌고, 그 동쪽에 3단으로 기단을 쌓아 ‘明成皇后遭難之地(명성왕후조난지지)’라고 새긴 표석을 세워 놓았다.
건청궁 창건 당시의 원형은 「북궐도형(北闕圖型)」과 『궁궐지(宮闕志)』 등을 통해 전체의 구성, 규모 등은 알 수 있으며 2007년 건청궁의 복원이 이루어져 건청궁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건물 전체의 배치는 크게 세 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장안당(長安堂)·곤녕합·복수당(福綏堂)으로 이루어진 구역이 162.5칸, 장안당 서쪽에 있는 각감청(閣監廳) 60칸, 남쪽에 있는 연못과 그 가운데에 만들어진 섬과 향원정(香遠亭), 섬과 건청궁을 잇는 취향교(醉香橋)로 이루어진 궁궐 안 후원 등이 있다.
건청궁은 근세사의 중요한 두 사건인 명성황후 시해와 최초로 전기 설비를 하였던 역사적 장소일 뿐 아니라 건축사적 측면에서도 주목해야 할 건물이다. 중국에서도 명나라 때 자금성(紫禁城)에 건청궁·교태전·곤녕궁 등을 세웠는데, 남북 방향으로 일직선 위에 늘어놓는 형식을 택하고 있어, 우리의 것과 이름만 같을 뿐 배치 형식은 전혀 다르다.
경복궁 안에 지은 건청궁의 배치 형식은 조선시대 상류 주택의 공간 구성과 거의 비슷하다는 점에서 창덕궁 후원에 있는 연경당(演慶堂)과 비교, 고찰해 볼 가치가 충분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