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화사전(大漢和辭典)』에 따르면, 전장은 전사(田舍)·전가(田家)·농가(農家) 혹은 별장(別莊)·별저(別邸)·장원(莊園)이라고 해 주로 농가건물을 지칭하고 있다. 또한, 『한국고전용어사전』에서는 개인이 소유한 논밭, 즉 농지를 가리키는 것으로 본다.
그러나 사료를 검토해 볼 때 전장은 단순한 농지나 농가의 건물만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농지와 농지를 운영하는 데 필요한 장사(莊舍, 혹은 農舍)를 함께 이르는 말이다.
농지가 주가(主家)와 인접해 있으면 장사를 굳이 설치하지 않는다. 따라서 대개의 경우 농지가 주가와 멀리 떨어져 있으며, 그 농지가 비교적 규모가 클 때에 장사를 세우는 것으로 보인다. 일례로, 세규사(世逵寺)의 장사가 세규사와 멀리 떨어진 명주(溟州)의 내리군(奈李郡)에 소재하고 있는 데서 알 수 있다.
전장은 우리나라 경제에서 토지가 중시되던 시기, 국가가 결부제(結負制)를 매개로 토지를 파악하던 시기, 사적인 토지소유권이 확립된 시기에 출현한 것으로 보인다.
기록상으로는 삼국시대 초부터 보이기 시작하는데, 가장 오래된 기록으로는 3세기 전반기에 항복해 온 골벌국(骨伐國)의 왕에게 신라의 국왕이 전장을 사여했다는 내용이다.
이밖에도 전장은 여러 가지 계기에 의해 형성되었다. 그 중 국왕의 사여(賜與)에 의한 것이 많이 보인다. 김유신(金庾信)·김인문(金仁問)이 고구려와의 전쟁의 공으로 662년(문무왕 2)에 전장을 국왕으로부터 받았다.
고려 초에는 국왕이 지방의 서재학사(書齋學舍)에 전장을 사여해 비용을 충당하도록 한 예도 보인다. 사찰이 시납을 받아 전장을 갖게 된 예도 있다. 감산장전(甘山莊田)을 희사해 감산사(甘山寺)를 만든 경우 장전(莊田)이 감산사의 토지로 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승려 지증(智證)이 장(莊) 12구(區), 전(田) 500결을 사찰에 희사한 경우도 있다. 또한, 권세가들은 권력을 이용해 땅을 개척하거나, 농민의 토지를 강점해 전장을 마련한 경우도 있다. 고리대를 매개로 전장을 소유하게 된 예도 있다.
통일신라 이후 전장에 관한 기록은 더욱 많아지는데, 이것으로 보아 그 무렵에는 널리 보급되었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신라 하대에 이르면 전장은 더욱 확대된다.
고려의 건국 후 전장은 부분적으로 정치적으로 문제가 된 경우에 한해 몰수 등의 정리가 수반되었을 것이지만, 대대적인 정비는 없었다.
고려 후기에는 전장에서 ‘초닉인민(招匿人民)’, ‘초집제민(招集齊民)’한다는 표현이 자주 보이는데 이는 권세가가 전장을 매개로 민인을 노비로 삼아 사역시키는 수가 많음을 알 수 있다.
조선시대에도 전장이라는 표현이 보인다. 아마 대토지 경영, 그리고 장사가 존재하면 이러한 전장은 계속 존재했을 것이다. 그러나 농업생산력이 높아져 지주가 필요로 하는 농지의 규모가 작아지고, 운송수단이 발달하게 되면서 전장의 수는 줄어들게 되었을 것이다.
전장은 전국적으로 분포하였다. 그러나 농지의 비옥도나 교통 문제 등으로 주로 경기도와 하삼도 지방에 분포하며, 평안도함경도 등 국경지역에는 거의 분포하지 않는다.
전장의 규모는 다양했지만, 장사를 중심으로 일정하게 지편(地片)이 모여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하나의 전장을 중심으로, 통일신라의 경우에 40결 정도였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것은 장 12구 전 500결이라는 데서 알 수 있다. 그러나 40결의 전토가 하나의 권역을 형성하도록 집중되어 있지 않고, 여러 필지로 분산되어 있었을 것이다.
전장이 클 경우에는 하나의 촌락을 형성했을 것으로 보인다. 전장은 물론 농지만으로 구성되는 것은 아니었다. 진여원(眞如院)의 경우 시지(柴地) 15결, 율지(栗地) 6결, 좌위(坐位) 2결에 전장을 두고 있다.
전장은 대체로 주가와 떨어져 있으므로 주가에 딸린 노동력을 중심으로 경영하는 것은 곤란하였다. 물론, 노비나 주변 농민들에게 요역 노동을 부과해 경작하는 수도 있었겠지만, 중심은 소작제(小作制)에 의해 경영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소작을 담당하는 주된 층은 노비가 아니라 양인농민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그들은 소출의 1/2을 지대(地代)로 납부하였다.
전장에는 주가가 지장(知莊)이라 불리는 관리인을 파견해 경영하였다. 세규사의 경우 전장에 승려를 파견해 관리하도록 했는데, 속인이 소유한 전장의 경우는 주로 노비를 보내 운영했을 것이다.
전장에 파견된 지장은 주가의 지시를 받아 전장의 경영을 충괄하였다. 그가 담당하는 일은 영농과정에 대한 감독, 농민으로부터의 수취, 곡식의 운반 및 처리 등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전장주에게 운송하고 남은 곡식은 장사에서 종자나 빈민구제로 쓰였다. 때에 따라서는 고리대로 운영하는 일도 있었다. 특히, 사원의 전장에서 보(寶)를 운영하는 예가 보이는데, 이것은 곧 장사에 보관하는 곡식을 가지고 고리대 운영을 하고 있음을 말한다.
장사에 전장주가 거처하기도 했다. 고려 말에 유숙(柳淑)이 조일신(趙日新)의 모함으로 전장에 거처한 것이 그 예이다. 또한, 이성계(李成桂)의 첫째 부인 한씨(韓氏)가 포천(抱川)재벽동(滓濶洞) 전장에, 둘째부인 강씨(康氏)가 포천철현(鐵峴) 전장에 거처하였다.
이것은 전장이 농업경영에서만 의미 있는 것이 아니라 전장주의 활동공간으로서의 성격을 가지고 있음을 말해 준다. 전장은 기본적으로 사적인 대토지 소유를 기반으로 하므로 국가에 대해 공과(公課)·공부(公賦)를 부담하는 것이 원칙이었다.
그러나 그 소유자가 최고 권력층이므로 전조를 면제받거나, 때로는 거부하는 경우도 있었을 것이다. 이 경우 조세를 납부하지 않아도 되는 불수(不輸)의 특권을 갖게 되는 것이다. 이 경우 국가재정에 심대한 타격을 주게 됨은 물론이었다.
전장에는 장사가 있었다. 장사에는 관리인이 거처하며 전장을 운영하였다. 그리고 장사에 추수한 곡물을 저장하거나 우마를 사육하기도 했으며, 또한 농기구를 저장하기도 하였다.
장사의 규모는 정확히 알 수 없다. 하지만, 16세기 초 한명회(韓明澮)의 경우는 폐현(廢縣)의 공아좌지(公衙坐地)와 관사(官舍) 130여 칸을 차지해 농사(農舍)로 삼은 것으로 나온다. 이 경우 농사는 최소한 130여 칸에 이르렀을 것이다.
한명회는 당시 최고의 권신이었기 때문에 이것을 일반화시키는 것은 무리이다. 그러나 분명 장사의 규모가 작은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장사를 근거로 권세가들은 인접한 농민들을 사역시키거나 또는 유민(流民)들을 끌어들여 전장의 경영에 활용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