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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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권씨세보 / 성화보
안동권씨세보 / 성화보
가족
개념
혈연적 유대의 범위를 결정하는 사회의 출계원리에 따라 인지되거나 제도화되어 내려오는 한 집안의 계통체계를 가리키는 가족학용어.
• 본 항목의 내용은 해당 분야 전문가의 추천을 통해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내용 요약

가계는 혈연적 유대의 범위를 결정하는 한 집안의 계통 체계이다. 가계는 대를 물린 결과이며 선대를 인지할 수 있는 근거가 된다. 고려말 도입된 성리학에 따라 종자(宗子)가 제사를 주관하는 원칙이 확립되었다. 가계는 질서 유지를 위해 종약(宗約), 종규(宗規), 종약소(宗約所)를 두었다. 가계가 확산되는 경우, 파조(派祖)를 내세웠으며, 이 경우 입향조가 파조가 되었다. 가계의 유대 관계를 밝힌 족보는 직계친과 방계친, 존속친과 비속친을 구별하였다. 가계 존속과 관련된 내용은 가례(家禮)라는 형식으로 구현되었다.

목차
정의
혈연적 유대의 범위를 결정하는 사회의 출계원리에 따라 인지되거나 제도화되어 내려오는 한 집안의 계통체계를 가리키는 가족학용어.
내용

가계는 선대(先代)의 입장에서는 대를 물린 결과이며, 후손(後孫)의 입장에서는 자신들의 선대를 인지할 수 있는 근거가 된다. 여기에서 ‘가(家)’, 즉 집안은 세계(世系)가 거듭될수록 당내(堂內), 문중(門中)과 같은 가족 단위 이상의 조직체 또는 비조직적인 범주로 그 인지 범위가 확산된다.

가계는 이와 같이 확산되는 친족관계를 인지할 수 있는 기준을 마련해주는 것이기 때문에 승가계사(承家繼嗣)로서의 제사의 계승형식과 일치하지만, 가족 또는 친족간에 개인 대 개인으로 이루어지는 지위 계승이나 재산 상속에 관한 내용과 반드시 일치한다고 볼 수는 없다.

그러나 가계의 형성과 유지의 동기가 대부분 가산(家産)의 분산을 방지하고, 정치적, 사회적 지위에 대한 기득권을 존속시키고자 하는 데 있으므로, 대부분은 지위 계승이나 재산 상속과 일정한 관련을 보인다.

성(姓)을 근간으로 하는 부계적 혈통의 대물림을 강조해 온 우리나라는, 특히 고려 말 성리학과 함께 도입되어 사대부가의 제의(祭儀)에 적용되고 정착되어 간 남송(南宋)의 종법(宗法)에 의해 부계적인 가계의 인식이 더욱 강화되고 뚜렷해지게 되었다.

즉, 성리학에 대한 이해가 깊어짐에 따라 종자(宗子)만이 제사를 주관하는 원칙이 확립되고, 입후자(立後者)를 친자(親子)로 하여 제사를 받드는 승중봉사(承重奉祀)하는 적계주의원칙(嫡系主義原則)이 정립되면서 종법제도가 광범위하게 수용된다. 그러나 실제로 일반에서는 조선 중기까지만 해도 제사윤회제(祭祀輪廻制)라든가 아우가 제사를 잇는 형망제급(兄亡弟及)의 혈통주의적인 배행주의(輩行主義) 방식이 절충되어 시행되었다.

가계 안에서의 유대관계를 밝혀 놓은 족보 또한 한 집안의 혈통의 맥을 넓히고 깊게 하는 데 기여하였다. 족보는 종으로는 혈통관계를 밝히고, 횡으로는 동족관계를 기록함으로써 직계친(直系親)과 방계친(傍系親), 존속친(尊屬親)과 비속친(卑屬親)을 각기 구별하였다.

특히 양반, 귀족에 있어서는 사회적 특권이 세습되었으므로, 그 자손들은 납세, 부역, 군역과 같은 의무를 면제받을 수 있었기 때문에 족보를 통해 가계상의 신분을 명확히 하는 것이 절실히 요구되었다. 그 결과 가계는 확고한 부계 중심의 체계를 이루게 되어 거의 모든 가치관과 규범 및 행동 양식들이 이에 바탕을 두게 되었다.

우선 가족 제도를 보면 제사를 잇는 적자손(嫡子孫) 중심의 직계가족이 구성되어 계승자를 우대하는 가부장제적 성격이 강화되었고, 가족 관계에도 이와 같은 가계 존속에 대한 강조로 부부나 형제, 자매 관계보다는 부자관계가 중요시되었다. 또한 이에 대한 강조는 양자제도(養子制度)의 발전을 가져다 주었다.

가풍(家風)에 대한 관심이나 가훈(家訓), 가도(家道) 등에 관한 내용에서도 가족 또는 가계 내 성원간의 화목과 결속을 통해 가계를 지속적으로 발전시키려는 의도를 찾아볼 수 있다.

가족의 단위를 넘어 당내, 문중 등을 단위로 하는 친족집단 또는 제도에서도 가계 존속에 대한 가치관은 마찬가지로 나타난다. 가계를 이어가는 방식의 하나로 우리나라의 분가제도를 보면 동거공재(同居共財)하는 중국과는 달리 혼인 후 곧 분가별산(分家別産)하였으며, 분가하더라도 본가 근처에서 사는 거주방식을 택하여 가부장적 가족제의 특질을 유지하였다.

상속에 의해 선대의 재산이 분할되더라도 이러한 거주방식으로 인해 이의 분산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으면서 본가, 분가의 관계가 지속되었으며, 장자를 우대하는 불균분상속과 사회적 지위의 상속으로 분가에 대한 본가의 우위가 지켜졌다.

이와 같은 현상이 누적된 결과 종가(宗家)와 지가(支家)의 구분이 생겨났고, 특히 분가 후의 거주원리에 의해 동성마을과 같은 지역적 유대를 갖는 공동체의 출현이 가능해졌다.

가계의 중심체가 된 종가의 종손은 사당(祠堂)을 모시고 제사를 주도했으며, 종족의 일반 성원들은 존종사상(尊宗思想)에 의해 종가를 받들었다. 또한 지역적 연고를 갖는 가계 내의 성원들끼리는 서로간의 친목도모와 관혼상제 때의 경제적 원조, 사회적 지위의 고양과 종중 재산의 관리와 증식 등 가계 결속을 목표로 하는 종회(宗會)와 종계(宗稧)를 결성하였다.

가계의 질서 유지를 위해 종약(宗約) 또는 종규(宗規) 등을 만들었고, 종약에 근거한 종약소(宗約所)를 둔 경우도 있었다.

이와 같은 부계 혈통 중심의 가계 존속에 대한 강조로 인해 가계의 대(代)가 깊어지고 횡적으로 확산되는 경우에는 파조(派祖)를 내세워 분파하여 별개의 가계를 형성하고 계승해 나가는 경향이 있었으며, 이러한 경우 지역적 연고를 중요시하여 입향조를 파조로 내세우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이상과 같은 가계 존속에 대한 강조에서 비롯된 제반 현상들은 특히 가례(家禮)를 통해 구현되었는데, 가계 내의 성원들은 자신들의 존재를 이에 준거하여 규정하였고, 또한 규정된 상황을 받아들였다. 가례의 수행뿐만 아니라 비(碑), 사당, 가묘, 그리고 서원이나 사우(祠宇) 등의 설립은 이러한 가치관과 이념의 물화과정(物化過程)이었으며, 우리나라의 뿌리 깊은 조상숭배사상도 가계 존속이라는 이러한 논리의 연장으로 파악될 수 있다.

가계의 형성과 계승, 그리고 그 결과로서의 친족 집단 구성은 전통사회의 모든 백성들에게 해당되었던 현상은 아니다. 그것은 최소한의 물질적 기반이 갖추어져야 가능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전통사회에서 가계의 확립은 신분의 상승과 유지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쳤고, 가치관의 중요한 부분을 이루고 있었기 때문에 일반 평민들에게까지 점진적으로 확산되어 갔다.

그러다가 외부로부터의 자본주의 침투와 근대화 추진으로 가치관의 변화가 일어나고, 도시화 및 핵가족화에 따라 가계 내외 성원들이 분산되었다. 또 토지개혁 등으로 그 물적 기반을 잃음으로써 현대의 대부분의 가계는 간소화된 가례의 수행과 족보 편찬 등으로 명목상 유지되어 가고 있는 실정이다.

참고문헌

『한국가족제도사연구』(최재석, 일지사, 1983)
『한국가족의 사적연구』(이광규, 일지사, 1978)
『가족관계학』(김주수, 진명문화사, 1973)
『한국가족제도연구』(김두헌, 서울대학교 출판부, 19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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