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토면세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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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사
제도
조선 후기의, 내수사전(內需司田) 또는 후궁 · 대군 · 군 · 공주 · 옹주 · 현주 등의 궁방(宮房)이 보유한 토지를 비롯하여 능원묘위, 각아문, 각양잡위 전답 중에서 면세된 토지.
이칭
약칭
유토(有土)
내용 요약

유토면세전(有土免稅田)은 궁방의 사적 대토지로 면세 특권을 누리는 토지였다. 조선 후기의 궁방전은 왕실·왕족들이 직접 지배하는 사유지와 왕실·왕족들의 지배하에 있는 일반 민전인 수조지가 있었다. 전자를 유토면세전 또는 영작궁전(永作宮田)이라 했고, 후자의 수조지를 무토면세전 또는 원결궁둔전(元結宮屯田)이라 하였다. 내수사 및 각 아문의 토지나 능원묘위전, 각양잡위전 중에서도 유토면세전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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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조선 후기의, 내수사전(內需司田) 또는 후궁 · 대군 · 군 · 공주 · 옹주 · 현주 등의 궁방(宮房)이 보유한 토지를 비롯하여 능원묘위, 각아문, 각양잡위 전답 중에서 면세된 토지.
내용

7년에 걸친 임진 · 정유의 왜란으로 우리나라 국토는 참혹히 황폐해져 많은 농토가 황무지로 변하였다. 임진왜란 이전의 전국 경지가 150만∼170만 결이었던 것이 임진왜란 직후에는 30만 결로 격감하였다. 더욱이 그 복구가 지지부진해 오랫동안 종전의 상태를 회복하지 못하였다. 전란으로 늘어난 황무지를 재개발하기 위해 훈련도감이 영문 둔전(營門屯田, 군문 둔전(軍門屯田)이라고도 함)을 처음으로 설정하였다. 그곳에 유랑하는 농민들을 모집해 농구, 종자 등을 지원하면서 황폐한 진황지(陳荒地)를 개간하게 하였다. 이것이 영문 둔전의 시초이다. 훈련도감은 경작 농민으로부터 절반 정도 지대를 받아 군량(軍糧)에 충당하였다. 인조 대 이후에는 각종 독립 군단에 해당하는 영문과 행정 기관인 아문(衙門)도 각기 둔전을 설치해 독자적인 재정 수입 기반을 구축하였다. 왕실의 각 궁방도 이에 따랐다.

유토면세전은 임진왜란 이후 주로 각 궁방이 입안절수(立案折受)의 형식으로 진황지를 불하받거나 민간의 농토를 사들여서 확대한 궁방의 사적 대토지이다. 해당 궁방이 절반 정도의 조( 『속대전』의 규정에 의하면 결당 200두)를 거두는 대신, 국가로부터는 면세 특권을 누리는 토지였다. 본래 대군 · 군 등 왕족에게는 국초 이래 처음에는 과전법, 뒤에는 직전법에 따라 일정한 토지가 지급되어 그 생활을 보장하였다. 명종 때 직전법이 폐지된 이후에는 법적으로 이들에게 토지를 급여하는 특전이 없어졌다가, 임진왜란 이후에 다시 이들에게 토지가 급여되었다.

『만기요람(萬機要覽)』 편수 당시 전국에 흩어져 있는 면세 궁방전은 모두 3만 7,926결이었다. 이 중에서 유토면세전이 1만 1,380결이고, 무토면세전이 2만 6,547결로서, 이 궁방전에는 3,797결의 내수사전도 포함되어 있었다. 궁방전은 면세지였으므로 이런 특혜를 노려 권력자들이 궁방과 결탁해 궁방전이라는 명목으로 자기의 토지를 확대하고 세역(稅役)을 포탈하는 일도 흔히 있었다. 또 자기의 토지를 궁방에 투탁해서 더 유리한 조건으로 경영을 꾀하려 한 무리들도 적지 않았다.

이렇듯 면세지인 궁방전의 증가는 국가 재정의 기반을 불안정하게 만들었다. 결국 궁방전을 축소하자는 논의가 여러 차례 일어나 『속대전』에서도 그 결수를 제한했으나 개혁은 실행되지 못하였다. 1894년(고종 31) 갑오승총으로 궁방전의 면세 특권과 무토면세의 제도가 폐지되고, 유토면세전은 왕실 소유가 되어 궁내부로 이관되었다. 이렇게 되기까지 궁방전의 소유 관계는 매우 복잡해 토지 대장도 제대로 정리되지 못한 상태였다. 그리고 경작자와 소유자 사이에는 궁차(宮差) 또는 도장(導掌)이 끼어들어 궁방전의 관리 및 수세(收稅)를 담당하였다. 궁방전(유토면세전)의 경영은 궁방에서 직접 궁원의 직원이나 하인인 궁차를 파견해 직접 경영하는 직영제(直營制)를 취하는 경우와, 도장이라는 일종의 수세 청부인을 임명해 그에게 관리권을 위임하는 위탁지 경영의 형태를 취하는 경우가 있었다.

또한 어느 경우이든 궁차나 도장 밑에는 감관(監官), 마름[舍音]이라는 하급 관리인이 연결되어 있었다. 마름은 장토(庄土)를 관리하는 최하의 담당자로서 보통 장토의 농민 중에서 선발하였다. 감관은 장토 관리의 하부 조직에서 농민을 통제하는 실권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하여 장토 안에서 곡물을 추수, 상납하기까지의 모든 문제를 마름과 협의해 감독, 처리하였다. 궁방전(혹은 궁장토)은 위탁 관리인인 도장을 통해 운영, 관리되는 경우가 많았다. 도장은 궁방으로부터 도서첩문(圖署帖文)이나 완문(完文)을 받아야 하였다. 이것은 도장이 될 수 있는 일종의 임명장이었다. 또한 도장권은 상속과 매매가 가능하였다. 도장권의 매매는 도장권 매매문기를 통해 이루어졌으며, 도장권의 값어치를 도장가(導掌價)라고 일컬었다. 도장가는 도장이 관장하는 장토의 규모나 수익에 따라 정해졌다.

궁방전은 본래 유토면세전이나 무토면세전을 가리지 않고, 대체로 도장을 파견해 수세와 경영을 맡게 하는 것이 상례였다. 그러나 정조 대 이후부터는 궁방과 소속 농민들 사이에 있는 도장의 비리와 그로 인한 민폐가 큰 문제로 드러났다. 19세기 후반이 되면 왕실과 관계된 인물들이 도장권을 매집한 사례가 다수 확인되는데, 이는 도장이 독자적으로 장토를 관리하였다기보다는 밀접한 관련하에 장토 경영에 깊이 관여하였음을 보여준다.

참고문헌

원전

『탁지지(度支志)』
『내수사급각궁방전답총결여노비총구도안(內需司及各宮房田畓摠結與奴婢摠口都案)』
『만기요람(萬機要覽)』
『탁지전부고(度支田賦考)』
『비변사등록(備邊司謄錄)』
『내국세출입표(內國歲出入表)』
『결호화법세칙(結戶貨法稅則)』

단행본

和田一郎, 『朝鮮土地·地稅制度調査報告書』(朝鮮總督府, 1920)
김용섭, 『조선후기농업사연구』(일조각, 1970)
조영준, 『조선 후기 왕실재정과 서울상업』(소명출판, 2016)

논문

박준성, 「17·18세기 宮房田의 확대와 所有形態의 변화」(『한국사론』 11, 서울대학교 인문대학 국사학과, 1984)
양선아, 「18·19세기 도장 경영지에서 궁방과 도장의 관계」(『한국학연구』 36, 고려대학교 한국학연구소, 2011)

인터넷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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