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문 ()

법제 /행정
문헌
조선시대, 관청 등 공공기관에서 행정 처분을 보장하는 데 사용하던 증빙 문서.
이칭
이칭
완호문(完護文)
문헌/문서
용도
행정 처분 보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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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요약

완문은 조선시대 관청 등 공공기관에서 행정 처분을 보장하는 데 사용하던 증빙 문서이다. 조선시대 공문서의 일종으로서 관청 등의 장이 특권 부여, 분쟁 방지, 폐단 시정 등을 행정적으로 처분하고 난 뒤에 처분의 보장을 증빙하였다. 이 특성은 이칭인 ‘완호문’에서 잘 나타나듯이 누군가의 권리를 완전히 보호한다는 뜻을 드러내며, 완전한 합의를 뜻하는 ‘완의문’의 줄인 말인 완문과 구별된다. 발급자는 수령인 경우가 가장 많지만, 다른 관청 및 사회집단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하며, 수급자도 이와 마찬가지이지만 그 중 사족 집안이 대표적이다.

정의
조선시대, 관청 등 공공기관에서 행정 처분을 보장하는 데 사용하던 증빙 문서.
제작 및 발급 경위

기원

완문(完文)의 기원은 특권의 보장이라는 내용으로만 따진다면 「광개토대왕비」에서 묘지기의 신원을 고지하고 그들의 의무와 특권을 규정하였던 데에서부터 찾을 수 있을지 모른다. 이와 같은 특권 보장의 규정은 고려 후기 몽골제국에서 나타난다. 각 종교 제단은 황제를 위하여 하늘에 기도하여 축복하였고, 황제는 이 같은 봉사에 대한 대가로 각 종교 제단에 세역의 면제 등의 특혜를 주고, 국가적인 보호와 존숭을 아끼지 않았다. 특혜를 담보하는 문서로는 몽골의 황제나 왕후 귀족이 성지(聖旨) · 영지(令旨) · 의지(懿旨) · 균지(鈞旨) · 법지(法旨) 등 각종 문서의 형태로 종교 교단에 내렸으며, 이때 그 문서의 성격은 ‘보호 특허장’이었다. 이러한 전통은 15세기 세종조에 국왕이 사찰에 발급된 어느 교지를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으며, 문서 양식과 내용에서 이후 생산된 완문에 더욱 가까워졌다.

하지만 우리가 통상 완문이라고 지칭하는 문서가 본격적으로 생산된 시기는 16세기 이후로 보아야 할 것 같다. 당시 완문이라는 문서명이 처음 등장하고 그 내용도 모두 고을의 수령이 사족 집안의 특권 보장과 관련되어 발급한 것으로 확인된다. 이러한 점을 미루어 보아 16세기 이후 완문은 사족의 특권과 깊은 연관성을 가지고 시작되었고 전개되었음을 알 수 있다.

발급 명분과 관행

대부분 완문의 발급 명분은 충(忠) · 효(孝) · 존현(尊賢)으로 귀결된다. 이러한 발급의 정당화는 전통적인 가치를 매개로 조선의 정부와 백성들이 복잡다단한 방식으로 결합하여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현존하는 완문을 통해 같은 사안에 대해 완문이 계속 중첩되어 발급되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는데, 이는 완문이 비공식적인 문서로서 입안(立案) 등의 다른 공문서에 비해 효력이 약하였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이는 동일한 사안에 대해 여러 기관에서 중복해서 완급을 수급하는 현상을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완문을 중첩적으로 발급하는 관행을 살펴보면, 이를 두 가지 측면에서 이해할 수 있다. 첫 번째는 같은 사안에 대하여 수령이 교체될 때마다 계속 중첩하여 발급하는 관행을 보여준다. 다른 하나는 같은 사안에 대하여 하급관청으로부터 상급관청에 이르기까지 수직적으로 중첩하여 발급하는 관행이다. 전자는 완문의 발급 권한이 수령의 재량권에 속해 있으므로, 그 효력은 대개 수령의 재임 기간에 한정된다는 것을 보여주는 사례이다. 후자는 완문의 발급 특권이 실질적으로 수령의 재량권에 속해 있긴 하였지만, 상급관청의 보증력도 이에 못지않게 중시되었다는 점을 보여주는 사례이다. 그러나 이들 사례는 모두 완문이 문서로서 갖는 효력이 매우 불안정하였다는 것을 방증해주는 예라고 볼 수 있다.

여기서 복수 발급이라고 하는 것은 발급자가 동일 사안에 대하여 여러 관련 부서에 동시에 발급하는 사례를 가리킨다. 여기서 완문의 특성에 따라 2~4건의 완문이 동시에 발급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와 같이 완문을 복수로 발급하는 것은 탈역과 관련된 모든 행정기관에 완문을 발급함으로써 사안이 되는 탈역의 효력을 더욱 공고히 하고자 하는 데 목적이 있었다고 할 수 있다.

형태와 내용

완문이 여타의 관문서와 구별되는 가장 뚜렷한 특징은 문서식, 내용 등을 포함한 발급 조건을 규정한 어떠한 규정도 법전 등에 제시되어 있지 않다는 것이다. 따라서 형태와 형식에서 매우 자유로운 양상을 보여준다. 하지만 이 문서는 제목으로 제시된 ‘완문’, ‘완호문(完護文)’ 등과 이 문서의 전체 의미를 제시하고 있는 기두사에 쓰인 “위의 완문은 완호를 위한 것임[우완문위완호사(右完文爲完護事)]”의 문구 등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이때 발급자를 구체적으로 열거하면 완문의 발급자는 대부분 수령이었지만 그 밖에 비변사(備邊司) · 의정부(議政府) · 예조(禮曹) · 병조(兵曹) · 호조(戶曹) · 형조(刑曹) · 성균관(成均館) · 한성부(漢城府) · 충훈부(忠勳府) · 종부시(宗簿寺) · 궁방(宮房) · 감영(監營) · 군영(軍營) · 암행어사(暗行御史) · 이청(吏廳) · 서원(書院) · 문중(門中) 등 상급관청에서 최말단의 하급관청 및 사회집단에 이르기까지 거의 모든 국가기관 및 사회집단도 망라하고 있다. 수급자도 국왕(國王) · 궁방 · 감영 · 읍사(邑司) · 이청 · 서원 · 향교(鄕校) · 공장(工匠) · 사찰(寺刹) · 사족(士族) · 중인(中人) · 상민(常民) · 천민(賤民) 등 다양한 관청, 사회 결사체 및 개인을 포함하고 있다.

그 내용을 일별해 보면, 사족 · 묘직(墓直) · 서원의 속점(屬店), 효자열녀(孝子烈女) 집안, 선파(璿派) 및 공신(功臣) · 선현(先賢) 자손 등의 탈역, 향교 · 계방(稧房) · 궁방 · 사찰 등의 보호, 민고(民苦)의 구폐, 도고(都賈)의 독점권 인정, 완의(完議)의 공증, 농업경영의 지원 등 국가가 행하는 사회정책의 전모를 포괄하고 있다.

의의 및 평가

완문은 16세기부터 지방 사회에서 지방관이 각종 특권을 보장하기 위하여 발급하기 시작하였다. 그 뒤 이 문서의 성격은 조선의 총체적인 사회 변화와 근본적으로는 그러한 변화에 영향을 받으면서 부분적으로는 자율적 세계로 존재하던 부분 사회의 특수한 사회 맥락에 따라 다양하게 변화하여 갔다. 조선의 멸망 직전까지만 하더라도 어느 신분이나 할 것 없이 이 문서를 수취하기 위하여 몹시 분주하였다. 이것은 당시로서는 매우 익숙한 풍경이었다. 이를 통해 이 문서가 당시 사람들에게 매우 각별한 의미를 지녔으리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완문이 지방 관가에서 활발하게 생산된 문서였으며, 그 내용이 특권과 관련되었고, 근대 이후 더 이상 생산되지 않았다고 한다면, 이 문서에는 조선시대 사람들이 가지고 있었던 권리를 향한 욕구와 성취를 알 수 있는 고유한 흔적이 남아 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참고문헌

단행본

김혁, 『특권문서로 본 조선사회: 완문의 문서사회학적 탐색』(지식산업사, 2008)
관련 미디어 (4)
집필자
김혁(덕성여대 역사문화연구소 선임연구원, 조선시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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