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구(戶口) · 공부(貢賦) · 전량(錢糧)의 정사(政事)를 담당했던 기관이다.
고려 건국 초에는 민관(民官)이라 하여 어사(御事) · 시랑(侍郎) · 낭중(郎中) · 원외랑(員外郎)을 두었으며, 속관(屬官)으로 사탁(司度) · 금조(金曹) · 창조(倉曹)를 두었다. 995년(성종 14) 중앙관제를 정비하면서 상서호부(尙書戶部)로 고쳤으며, 속관인 사탁을 상서탁지(尙書度支)로, 금조를 상서금부(尙書金部)로, 창조를 상서창부(尙書倉部)로 하였다가 뒤에 모두 없어졌다.
문종 때 관원과 품계를 정하였다. 즉 판사(判事)는 1인으로 하되 재신(宰臣)이 겸직하도록 했고, 상서(尙書)는 1인으로 품계는 정3품이며, 지부사(知部事)는 1인으로 하되 타관(他官)이 겸직하도록 하였고, 시랑은 2인으로 정4품, 낭중은 2인으로 정5품, 원외랑은 2인으로 정6품으로 정하였다.
1275년(충렬왕 1) 원나라의 강압에 의해 관제가 격하됨에 따라 호부는 판도사(版圖司)라 바뀌었고, 상서는 판서로, 시랑은 총랑(摠郎), 낭중은 정랑(正郎), 원외랑은 좌랑(佐郎)으로 고쳤다. 1298년에 충선왕이 호부를 민조(民曹)로 고쳤고, 판서를 상서로 개칭하고 정원은 종전과 같이 1인으로 하였다. 또 총랑을 시랑이라 하고 3인으로 늘려 그 중 1인은 타관이 겸직하도록 하고, 정랑은 낭중으로, 좌랑은 원외랑으로 하고 인원은 3인으로 늘려 모두 무신이 겸하도록 하였다.
1308년 충선왕이 다시 민부(民部)라 고치고, 삼사(三司)와 군기도염원(軍器都鹽院)을 여기에 병합하였다. 상서를 전서(典書)라 하여 3인으로 늘리고, 총랑을 의랑(議郎)으로, 정랑을 직랑으로, 좌랑을 산랑(散郎)이라 하고 모두 3인으로 하였다. 뒤에 다시 판도사로 고쳤으나 1356년(공민왕 5) 다시 호부로 고치고, 상서 · 시랑 · 낭중 · 원외랑이라 칭하였다. 1362년 다시 판도사로 고치고, 상서를 판서, 시랑을 총랑, 낭중을 정랑, 원외랑을 좌랑이라 고쳤다.
1369년 민부로 고쳐 상서 · 의랑 · 직랑 · 산랑이라 칭하였다. 1372년 다시 판도사로 고쳤으며, 관원의 명칭도 판서 · 총랑 · 정랑 · 좌랑이라 고쳤다. 1389년(공양왕 1) 호조로 고쳤고, 이 명칭은 조선시대로 이어졌다. 이속(吏屬)은 문종 때 주사(主事) 6인, 영사(令史) 6인, 서령사(書令史) 10인, 계사(計史) 1인, 기관(記官) 25인, 산사(算士) 1인을 두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