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38년(인종 16) 판관 1인을 두었다. 묘청(妙淸)의 난을 평정한 후부터 서경에 대한 고려정부의 의론이 일치되지 않아, 서경은 지맥(地脈)의 근본이 되는 땅이고, 태조가 중요시한 곳이기 때문에 옛 제도를 복구하여야 한다는 주장과, 서경은 반역을 일으킨 곳이므로 마땅히 일체의 구제도를 혁파하여 동경(東京)의 제도와 같게 하여야 한다는 주장이 대립되었다.
이로 인하여 오랫동안 어떠한 조처도 내리지 못하고 있다가 이에 이르러 비로소 이 관제를 설치하였다. 1178년(명종 8) 서경관제를 개정할 때 병부의 산하에 속하게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