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찬영 ()

정찬영
정찬영
회화
인물
일제강점기 「모란」, 「여광」, 「소녀」 등을 그린 동양화가.
인물/근현대 인물
성별
여성
출생 연도
1906년(고종 43) 6월
사망 연도
1988년 8월
출생지
평양
• 본 항목의 내용은 해당 분야 전문가의 추천을 통해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내용 요약

정찬영은 일제강점기 「모란」, 「여광」, 「소녀」 등을 그린 동양화가이다. 경성여자미술학교와 이영일의 아틀리에에서 채색화를 배웠다. 조선미술전람회에서 「지반(또는 수련)」(1929)과 「설중백로」(1930)로 연속 입선했다. 1930년대 조선미술전람회에서 활약하여 동양화부를 대표하는 여성 화가로 성장했다. 정밀한 관찰과 사생을 바탕으로 백로, 공작, 꿩, 칠면조 등 조류나 모란, 연꽃 등의 꽃과 인물을 작품의 주요 소재로 삼았다. 해방 후 가정 경영과 채색화에 대한 부정적 시선과 같은 개인적·사회적 여건이 맞물려 작품 제작을 중단했다.

키워드
목차
정의
일제강점기 「모란」, 「여광」, 「소녀」 등을 그린 동양화가.
생애

1906년 평양에서 출생하여 서문고등여학교를 졸업하고 숭현여학교에서 교편을 잡았다. 경성으로 주거를 옮긴 후 동양화가 김의식(金義植)이 설립한 경성여자미술학교와 이영일(李英一)의 아틀리에(atelier)에서 채색화를 배웠다.

1930년 25세에 도쿄데이코쿠대학교[東京帝國大學校] 약학부를 졸업한 도봉섭(都逢涉)과 결혼하였다. 1930년대 조선미술전람회에서의 꾸준한 활약으로 동양화부를 대표하는 여성화가로 성장하였다. 1938년 문학 작가와 화가의 봄나들이를 기획하여 소개한 『동아일보』의 「춘교이인행각(春郊二人行脚)」에서도 여류 작가인 모윤숙과 함께 정찬영이 그 첫 순서로 소개되는 등 근대기 문화예술계에서 큰 활약을 보였다. 그러나 한국전쟁 때 서울대학교 약학대학 학장이었던 남편 도봉섭이 납북된 후, 청량중학교, 광신상업중고등학교, 성동중학교에서 교사로 근무하며 자녀들의 양육에 전념했다.

1972년 국립현대미술관 ‘한국 근대 미술 60년전’에 「공작」이 출품되는 등 근대기 여성 동양화가로서 그의 작품이 재조명되기도 했으나, 해방 이후로는 더 이상 작품활동이 이어지지 않았다.

활동사항

정찬영은 정밀한 관찰과 사생을 바탕으로 백로, 공작, 꿩, 칠면조와 같은 조류(鳥類)나 모란[牧丹]과 연꽃 등의 꽃과 인물을 작품의 주요 소재로 삼았으며, 스승 이영일의 채색화풍에 깊은 영향을 받았다. 이영일은 이케가미 슈호[池上秀畝]가 주재한 덴신도화숙[傳神洞畵塾]에서 익힌 일본풍 채색화로 당시 조선미술전람회에서 큰 성공을 거두고 있었다.

정찬영도 조선미술전람회, 서화협회전람회의 활동을 바탕으로 ‘규수화가’로서 많은 언론의 관심을 받았다. 제8회와 제9회 조선미술전람회에서 「지반(池畔 또는 수련)」(1929)과 「설중백로(雪中白鷺)」(1930)가 연속 입선했다.

「지반」은 현재 평양 조선미술박물관에 소장되어 있음이 밝혀졌고, 「설중백로」는 밑그림[下圖](유족 소장)만이 남아있다. 이영일의 숙명여학교(淑明女學校) 제자들이 조선미술전람회에 출품했던 작품들 중에는 정찬영의 「설중백로」와 매우 유사한 작품이 있어, 이영일의 제자들이 공유했던 주제와 제작경향을 짐작할 수 있다.

1930년 「모란(牧丹)」이 서화협회전람회에서 특선, 제10회 조선미술전람회에는 화려한 공필채색(工筆彩色 : 동양화를 그릴 때 대상물을 꼼꼼하고 정밀하게 그리고 채색하는 기법)으로 공작을 그린 「여광(麗光)」(1931)이 역시 특선으로 입상하며, 조선미술전람회 동양화부 최초의 여성 특선작가가 되었다.

또한 조선미술전람회 제12회 「낙화유금(落花遊禽)」(1933)이 입선하였고, 제14회 「소녀(少女)」(1935)는 특선과 아울러 창덕궁상을 받았다. 봄나물을 캐러 나온 어린 소녀의 모습을 묘사한 「소녀」는 이영일의 「시골소녀」(국립현대미술관 소장, 1929)와의 영향관계를 여실히 드러내고 있다. 제16회 조선미술전람회에 출품한 「공작(孔雀)」(1937)은 정찬영의 마지막 입선작이 되었다.

이처럼 정찬영은 1920년대 후반, 1930년대 조선미술전람회, 서화협회전람회를 중심으로 활발한 활동을 했으나, 해방 후 가정 경영과 채색화에 대한 부정적 시선과 같은 개인적 · 사회적 여건이 맞물려 작품제작을 중단하였다. 그의 현전작이 많지 않은데, 조선미술전람회, 서화협회전람회에서 입상한 1930년대 공작 그림이 유족 및 국립현대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다.

참고문헌

『여류채색화의 선구자 정찬영』(도정애, 2000)
「한국 근대 ‘동양화’ 교육 연구」(김소연, 이화여자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12)
「한국 근대 여성의 서화교육과 작가활동 연구」(김소연, 『미술사학』20, 한국미술사교육학회, 2006)
「여류 채색화의 선구! 정찬영」(윤범모, 『월간미술』, 월간미술, 2000.6)
「여류인물평: 여류화가 정찬영론」(『신가정』, 동아일보사, 1933.3)
『중앙일보』(1965.12.4)
『동아일보』(1938.3.30/1931.5.31)
관련 미디어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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