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영일의 부친은 강원도 관찰사를 지낸 이규완(李圭完)이고, 모친은 일본 귀족 출신인 나카무라 우메코(中村梅子)이다. 5남 5녀 중 3남이며 호는 춘천(春泉)이다.
경기중학교를 졸업하고 1920년대 초에 8년간 동경 유학을 가서 일본화가 이케가미 슈호(池上秀畝)를 사사했다. 일본에 유학하는 동안 꾸준히 조선미술전람회에 출품했다. 근대기 채색인물화조화가로 활동했던 이영일은 1925년 제4회 조선미술전람회에서 화조화로 처음 입선하면서 등단했다. 1926년 제5회 조선미술전람회에는 무감사로 「춘광」을 출품했지만 모두 조선의 마음이 적게 나타난 것과 순화(純化)되지 못했다는 지적을 받는 등 일본화풍의 영향을 벗어나지 못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청량리 쪽에 직접 농장을 재배하며 화조화의 소재를 얻었다고 한다.
경성여자미술학교에 관여한 기록이 있는데 1929년 무렵이었던 듯하다. 숙명여자보통학교의 도화선생으로 7년간 재직했으며, 이 때 조복애(趙福愛), 김명하, 이유선, 최정순, 김자선 등이 조선미술전람회에 입선하는데 견인 역할을 했다. 이후에도 정찬영을 비롯한 4~5인의 여자 제자를 가르쳤다. 그 중 정찬영이 가장 이름 높았으며 평생 인연을 이어나갔다.
기골이 장대하여 ‘장사 화가(壯士畵家)’라 불렸으며 일본에 유학하는 동안 유도를 익혔다. 한국 동란 이후 1·4 후퇴 때 수원에 정착하면서 접골원을 운영했다.
1928년 춘천 이영일 개인전을 열었고, 1929년 동아일보사 주최 제1회 전조선학생미술전람회 심사위원을 지냈다.
1927년 제6회 조선미술전람회에 「화단의 일우」로 처음 특선을 했고, 제7회 「응추치도(鷹追雉圖)」, 제8회 「농촌의 아이들」, 제9회 「포유의 휴식」, 제10회 「추응(秋鷹)」이 연이어 특선을 차지하며 스타작가로 군림했다. 「응추치도」는 본래 「약육강식(弱肉强食)」이란 제목으로 출품했는데, 일본에 의해 불온한 작품이라 하여 곤욕을 치렀다. 당시 심사위원이 동경 유학중 스승이었던 이케가미 슈호였기 때문에 제목을 바꾸는 것으로 일단락 되고 특선까지 받았던 에피소드가 있는 작품이다. 1937년 제16회 조선미술전람회에 추천작가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