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청주(淸州). 자는 의지(宜之). 아버지는 상당부원군(上黨府院君) 한악(韓渥)이며, 어머니는 동지밀직전리판서(同知密直典理判書) 원경(元卿)의 딸이다.
음보(蔭補)로 녹남부사(錄南部事)에 진출한 뒤, 충혜왕의 신임을 받아 호군(護軍)에 제수되고 여러 번 승진하여 대호군 삼사우윤(大護軍三司右尹)에 올랐다.
집권층의 비위에 거슬려 전주목사(全州牧使)로 좌천되었으나, 선정을 베풀어 충목왕 때 소부(小府)·위위(衛尉)·선공(繕工)의 세 판사(判事)를 역임하였다. 이어 대언(代言)이 되고, 왕이 승하하던 날에 “임금과 신하는 시종(始終)이 있어야 한다.”고 하니, 공민왕이 한공의를 신임하여 산기상시(散騎常侍)에 임명하였다.
다시 호부상서(戶部尙書)로 옮겼으며, 2년이 지나자 다시 형부(刑部)로 옮겼는데 송사처리가 공정하였다. 1364년(공민왕 13) 밀직부사로 정조사(正朝使)가 되어 원나라에 다녀와서 이듬해 청성군(淸城君)에 봉하여졌다. 1365년 6월 신돈이 정권을 잡은 지 30여 일 만에 대신들을 참소하자 영도첨의(領都僉議) 이공수(李公遂), 시중(侍中) 경천흥(慶千興)과 함께 파면되었다. 시호는 평간(平簡)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