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정부의 행정기구와 비견되는 독립적인 행정기구, 즉 분사를 설치한 제도이다.
서경은 고려건국 직후부터 중요시되었다. 918년(태조 1)에 평양대도호부가 되었으며, 922년(태조 5)에는 낭관(郎官) · 아관(衙官) · 병부령(兵部令) · 납화부(納貨府) · 진각성(珍閣省) · 내천부(內泉府) 등의 관서가 설치되어 독립적인 행정기구가 갖추어지기 시작하였다. 특히 낭관에는 시중(侍中) · 시랑(侍郎) · 낭중(郎中) · 상사(上舍) · 사(史) 등의 관속이 있었는데, 당시 중앙의 최고행정기관이었던 광평성(廣評省)의 체제를 모방한 것으로 보인다.
이듬해에는 내천부가 진각성에 합해지고, 926년(태조 9)에 국천부(國泉府)가, 934년(태조 17)에는 관택사(官宅司) · 도항사(都航司) · 대어부(大馭府)가 새로이 설치되었다. 990년(성종 9) 수서원(修書院)이 설치되고, 1062년(문종 16) 개경의 경기에 준하는 서경기(西京畿) 4도(四道)가 설치되었다. 1102년(숙종 7) 문 · 무반의 직제와 5부(五部)가 설정되고, 이후 제학사원(諸學士院) · 각루원(刻漏院) · 의학원(醫學院) · 예의사(禮儀司) 등을 설치하였다. 1116년(예종 11)에 제학사원 이하 예의사가 분사국자감(分司國子監) · 분사태사국(分司太史局) · 분사태의감(分司太醫監) · 전례사(典禮司) 등으로 각각 바뀌었고, 열악원(閱樂院)을 새로 설치하였다.
이렇게 행정기구의 설치 · 운영, 문 · 무양반의 조직 · 직무 등이 중앙정부와 대등하게 됨으로써 분사제도가 확립되기에 이르렀다. 또한 군사제도도 중앙정부와 비등하게 조직되었으며, 서경감군(西京監軍)이 따로 설치되어 있었다. 그리고 이러한 조직을 운영하기 위해 서경대창(西京大倉)을 두었고, 이곳에 서해도(西海道)의 세량(稅粮)을 모아 서경관록(西京官祿)에 충당하였다. 그러나 1136년(인종 14) 서경에서 묘청(妙淸)의 난이 진압된 뒤, 분사어사대와 감군을 제외한 모든 관서들은 혁파되었다.
또한 서경기 4도 역시 폐지되고, 6현(縣)으로 대치되는 등 분사제도가 붕괴되기 시작하였다. 1138년(인종 16) 의조(儀曹) · 병조 · 호조 · 창조(倉曹) · 보조(寶曹) · 공조와 팔관도감(八關都監) · 동남면도감(東南面都監) · 서북면도감(西北面都監) · 제학원(諸學院) · 성용전(聖容殿) 등이 설치되어 이전의 분사들을 대신하게 되었다. 이로써 독립적인 행정기구로서의 성격을 점차 상실하게 되었다.
더욱이 서경에서 일어난 조위총(趙位寵)의 난이 진압된 뒤 1178년(명종 8)에 서경의 모든 관서들이 육조(六曹)에 분속되어 일원적인 행정체계를 이루게 되었다. 그리고 각 조의 사(史) 가운데 1인은 중앙정부에서 직접 파견되어 중앙정부의 통제가 강화되었다. 결국 서경의 분사제도는 완전히 붕괴되고, 중앙정부와 대등했던 서경의 행정기구는 토관직(土官職)으로 격하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