흥화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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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정보
고려시대사
지명
고려 전기, 성종 때 설치한 강동육주(江東六州)에 속한 성보(城堡).
지명/고지명
제정 시기
995년(성종 14)
폐지 시기
고려 말기
지역
평안도
내용 요약

흥화진은 고려 전기 성종 때 설치한 강동육주(江東六州)에 속한 성보(城堡)이다. 고려 초인 995년(성종 14)에 쌓았으며 뒤에 영주(靈州)로 고쳤다. 고려의 최전방 진(鎭)으로 영덕진(寧德鎭) 설치 이전까지 외교 창구로 기능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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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고려 전기, 성종 때 설치한 강동육주(江東六州)에 속한 성보(城堡).
위치

흥화진(興化鎭)은 지금의 평안도 의주 지역에 있었던 진(鎭)이다.

형성 및 변천

993년(성종 12) 거란과의 1차 전쟁 때 고려는 서희(徐熙)를 보내 주1과 강화 협상을 벌였다. 그 결과 고려는 송과의 관계를 끊고 거란에 사대하는 대신, 압록강 동쪽의 영유권을 인정받았다.

이에 고려는 연안 경로를 따라 곽주(郭州), 통주(通州), 철주(鐵州), 용주(龍州)를, 내륙 경로를 따라 귀주(龜州)와 흥화진을 쌓았는데, 이들이 강동육주(江東六州)이다. 이 중 압록강 건널목에 가장 근접한 흥화진이 거란과의 외교 창구가 되었다.

1010년(현종 즉위년) 거란은 성종(聖宗)이 직접 고려를 침공하였는데, 흥화진이 가장 먼저 공격을 받았으나 도순검사(都巡檢使) 양규(楊規)가 성을 지켜내었다. 개경까지 진주한 거란 성종은 고려 국왕의 친조(親朝)를 약속받고 철군하였다. 그러나 고려가 친조를 이행하지 않자 거란은 강동육주의 반환을 요구하며 여러 차례 변경을 침공하였다. 양국의 전쟁은 1018년(현종 9) 주3의 침공이 실패한 것을 끝으로 종료되고 국교가 복구되었고, 흥화진은 1030년(현종 21) 영주(靈州)로 승격하였다.

이후 고려는 압록강 어귀에서 동해안에 이르는 국경 지역에 추가로 주진(州鎭)을 설치하고 이들을 연결하는 천리장성(千里長城)을 쌓아 국경을 주4. 이후 거란과의 외교 창구는 거란에 가장 가까운 영덕진(寧德鎭)이 담당하였다.

참고문헌

원전

『고려사(高麗史)』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논문

송용덕, 「고려전기 국경지역의 주진성편제」(『한국사론』 51, 서울대학교 국사학과, 2005)
신안식, 「고려초기의 영토의식과 국경 분쟁」(『군사』 105, 국방부군사편찬연구소, 2017)
윤경진, 「고려 현종말-문종초 북계 주진 설치와 장성 축조」(『군사』 79, 국방부군사편찬연구소, 2011)
윤무병, 「고려북계지리고(상·하)」(『역사학보』 4·5, 역사학회, 1953)
주석
주1

거란의 장군(?~?). 고려 성종 12년(993)에 80만 대군을 이끌고 고려에 침입하였으나, 서희와의 담판에서 굴복하여 강동 육주를 고려에 넘겨주고 물러났다. 우리말샘

주2

임금이 친히 황제에게 가서 문안함.

주3

거란의 장군(?~?). 고려 현종 1년(1010)에 고려를 침공하여 개성을 점령하였고, 현종 9년에 10만 대군을 이끌고 다시 침입했으나 귀주에서 강감찬에게 대패하였다. 우리말샘

주4

경계 따위를 명확히 구별하여 정하다. 우리말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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