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친혼은 혼인할 상대가 내외근친에 해당되거나 혹은 재혼의 대상이 전처의 근친인 상황에서 성립된 혼인이다. 근친의 범위는 사회 또는 시대에 따라 각기 다르게 정해지며, 근친혼을 금지하는 범위도 변동을 보인다. 고려시대까지는 왕실과 귀족계층에서 근친혼이 성행했는데 고려말부터 이를 규제하는 제도가 자리잡기 시작하여 조선조에는 동성불혼과 내외 사촌간의 혼인금지 제도가 자리잡았다. 현재는 「민법」에서 근친혼에 관해 규제하고 있는데, 동성동본 금혼은 해제되었지만 금혼의 범위를 재래의 관습법보다 훨씬 더 넓혀 규정하고 있는 실정이다.
근친의 범위는 사회 또는 시대에 따라 관념상 각기 다르게 한정되게 된다. 그것은 대체로 당시의 친족적 유대와 이를 반영하는 친족관념에 의해 서로간의 혈연적 관련이 구체적으로 확인될 수 있는 친족들만이 근친의 범주 안에 포함되기 때문이다. 한편, 혼인은 일반적으로 당사자들의 의사보다는 그들의 부모를 포함하는 친족집단의 연장자들의 뜻에 따라 결정되어 왔기 때문에, 후자의 입장에서 보면 근친혼은 중혼(重婚)의 성격을 띤 혼인의 형태로 파악될 수도 있다.
근친혼이 당시의 법률이나 관습이 인정하는 혼인의 형태인가 아닌가의 여부 또한 중요하다. 이와 관련하여 근친혼에서의 근친의 개념과 근친상간에서의 그것과는 구별된다. 근친상간을 금기하는 것은 왕족이나 귀족과 같은 특수한 신분층의 경우를 예외로 하면, 거의 모든 사회에 보편화된 현상이기 때문에 상간이 금지된 근친간에 혼인이 성립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러므로 그것이 법률혼이나 사실혼으로서 인정되는 경우의 근친혼의 범위는 근친상간 금기에서의 그것과는 다른 것이다. 근친혼의 실상은 각 시대마다의 근친금혼에 대한 강조와 그 범위에 대한 입법과정 및 이의 시대적 변화에 대한 고찰을 통해서 파악될 수 있다. 우리 나라는 기록에 의하면 신라시대로부터 고려시대에 이르기까지 왕실이나 귀족계층에서는 동성이나 이성을 불문하고 근친혼이 행하여졌으며, 조선시대에서는 동성불혼과 함께 동성근친혼은 형벌을 과하면서까지 금하였으므로, 동성불혼의 법이 자리를 굳혔으나 이성근친혼은 여전히 행하여졌다.
신라시대에는 왕실에서의 동성 삼촌 내지 육촌간의 동성근친혼은 물론, 일반에서도 내 · 외 · 이종사촌자매간에 혼인이 행하여졌다. 특히, 신라시대 전체를 통하여 왕실에서는 이성간보다는 동성간의 혼인사례가 더 많았다. 고려시대에도 왕실 · 귀족들은 사촌간의 혼인을 금기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심지어 동부이모형제자매(同父異母兄弟姉妹)간에도 혼인하였다.
동성 사촌 내지 육촌간의 금혼은 1085년(선종 2)에 비롯하여 1147년(의종 1)에 이르기까지 수시로 직접 · 간접의 금혼령이 있었다. 그러나 1308년(충렬왕 34) 윤11월에 헌사(憲司)가 내외 사촌간의 혼인을 금지할 것을 청하였고, 1309년(충선왕 1) 11월에 비로소 문무 양반가의 동성금혼과 아울러 내외 사촌간의 혼인을 금하였으며, 1367년(공민왕 16) 5월에는 감찰사가 처의 사망 후 처제와의 혼인과 이성 육촌간의 혼인을 금지할 것을 청한 일이 있었다.
고려 후기의 호적에 나타난 양인(良人)들의 혼인 경향을 보면, 65쌍의 부부 중 동성혼을 한 자들은 12쌍이지만, 그 가운데 동성동본은 1쌍에 불과한데 그것도 근친혼이었는지는 불분명하다. 조선 초에 들어서는 동성불혼의 확립과 함께 내외 사촌간의 혼인은 하지 않게 되었으나, 일부 양반 사이에 내외 오 · 육촌 간에 혼인하는 사례가 더러 있었기 때문에 금혼입법의 필요성이 대두되었다.
마침내 1471년(성종 2) 5월에 대사간 김수령(金壽寧) 등이 “우리 나라의 습속은 남자가 여자의 집에서 살기 때문에( 男歸女家) 그 소생자녀와 외족과의 은의(恩義:갚아야 할 의리있는 은혜)의 정도가 동성간의 그것과 다르지 않으며, 외할아버지가 살아 있으면 내외종형제가 한 집에서 양육되고 외증조부가 살아 있으면 내외재종형제가 한 집에서 양육되는바, 한 집에서 양육된다는 것은 어려서부터 장년에 이르기까지 서로 형 · 아우 · 아저씨 · 조카 · 할아버지 · 손자라고 부르니 그 사이의 은의와 애정이 과연 동성지친(同姓之親)과 다를 것이 있겠는가. 요즈음 내외재종간 · 외족숙질간 · 외족조손 간에 혼인하는 일이 있는데, 비록 법이 금하는 바는 아닐지라도 인정에 비추어 보아 불안할 뿐 아니라, 이에 그치지 않고 장차는 외당고질간(外堂姑姪間) · 외당숙질간(外堂叔姪間)에도 혼인하기에 이를 것이다. 예는 인정에 따르는 것인데 인정이 순응하지 않으면 예는 무엇에 의거할 것인가?”라고 했다.
이에 대하여, 성종은 “중국에서는 이성무복자(異姓無服者)는 서로 혼인할 수 있으나, 우리 나라의 습속은 외친을 동성과 다름없이 중하게 여기므로 분경(奔競)도 또한 육촌을 한하여 금하니 이제부터 외친도 육촌까지 서로 혼인할 수 없다.”고 전지(傳旨)함으로써 이성금혼의 범위가 외가 육촌으로 정해졌다. 그리하여 이후에는 외가 쪽은 척의가 멀지라도 혼인하지 않은 자가 많고 모성(母姓)과 처성(妻姓)이 같은 것을 혐기하는 자도 생기게 되었다.
이렇듯 고려시대까지는 동성이건 이성이건 가깝기 때문에 혼인하였던 것이, 조선시대에 들어서는 동성불혼법이 강제되어 동성이어서 가깝기 때문에 혼인하지 않게 되자, 외가 쪽도 가깝기 때문에 근친간에 혼인하지 않게 된 것이다. 그러나 직접 피가 통하지 않은 양가 쪽 외가나 계모의 외가 쪽 사촌 사이에 혼인하는 예가 있었다. 특히, 양외가(養外家) 사촌간의 혼인은 입양한 뒤에는 금하였다.
동성불혼 및 외가근친불혼의 법과 관습에 의하여 외혼제(外婚制)가 확립되어 가까운 피가 섞이지 않은 것 같으나, 실은 혼인은 양반계급에서는 계급적 내혼제(內婚制)가 행해져서 이른바 동제간(同儕間)에 서로 주고받고 얽히다 보면 피가 매우 진하게 섞였다. 아버지의 외가인 진외가나 어머니의 외가인 외외가를 비롯한 월삼성간(越三姓間)은 되도록이면 가까운 범위에서 파척(破戚)한 것으로 하여, 이른바 근친혼을 함으로써 부계와 모계의 가까운 피가 섞이게 된 것이어서, 역설적으로는 동성불혼의 장벽을 이성근친혼에 의하여 무너뜨리고 있었다.
오늘날의 이성근친혼의 범위는 대체로 전통적인 관습 그대로인 것 같으며, 앞으로 내외 육촌간과 같은 근친혼이 행해질 가능성이 없지 않다. 현행 「민법」에서는 동성근친혼은 팔촌까지는 무효이고, 외가 쪽은 조문이 애매하여서 혈족이라고 본다면 팔촌까지는 혼인하면 무효이고, 인척이라고 본다 하더라도 팔촌까지 금하는 것이 된다. 또한 현행 「민법」은 인척간의 근친혼도 금하고 있는데 팔촌 이내의 방계혈족의 배우자간의 혼인, 직계인척간의 혼인은 무효이며, 남계혈족의 배우자, 부(夫)의 혈족 및 기타 팔촌 이내의 인척이거나 인척이었던 자 사이의 혼인도 금하고 있어, 재래의 관습법보다도 금혼 범위가 매우 넓어졌다고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