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 17관등 중의 제1등인 이벌찬(伊伐湌)의 다른 이름이다. 서발한(舒發韓)·서불한(舒弗邯)이라고도 표기하며, 각간(角干), 각찬(角粲)으로 불리기도 하였다.
몽고어에서 각(角)은 에베르(eber: ebur)로 읽히므로 이벌(伊伐)과 각(角), 찬(湌)과 간(干)은 같은 음의 다른 표기이다. 또한 각의 뜻은 뿔로 옛 글자는 ᄲᅳᆯ이다. ᄲᅳᆯ은 서불(舒弗)을 한 글자로 합쳐서 표현한 것이다. 서불은 오늘날 서울이란 뜻을 가진 단어로서 사로(斯盧)에서 비롯한 표기이므로 서불한은 곧 사로의 수장이란 의미도 담고 있다. 한편 각간은 주다(酒多)라고도 표기하였는데, 주는 술로서 서불한을 수붏한 또는 숧한을 그처럼 표기한 것이다.
서발한은 신라 17관등 중 제1관등이었으므로 당시 최고 지배층에게 주어졌다. 서발한에 임명된 인물 중 가계가 분명한 경우를 검토하면 대체로 왕족이거나 왕실과 긴밀한 관계가 있는 자들이었음이 확인된다. 서발한으로 삼을 때 대체로 군권(軍權: 兵馬事)을 겸하게 하거나, 국정을 위임하는 것으로 나타나므로 정국을 운영하는 핵심적 역할을 맡은 것으로 보인다. 한편 이벌찬의 이칭이 서발한이 아니라 서로 별개의 것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삼국사기(三國史記)』신라본기와 직관지(職官志)에는 17관등제가 32년(유리이사금 9) 봄에 제정되었다고 전한다. 하지만 실제로는 관등이 하나하나씩 두어지다가 520년(법흥왕 7) 율령을 반포할 때에 모두 완성되기에 이른 것으로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런데 파사이사금 때 이찬(伊湌)의 위에 주다〔각간〕를 두었다는 기록이나, 244년(조분이사금 15년) 우로(于老)란 인물을 서발한으로 삼았다는 기록을 근거로 그 기원을 이사금 시기라 추정하는 견해도 있다.
서발한이라는 명칭은 신라 말까지 사용된 반면 이벌찬은 6세기를 끝으로 더 이상 보이지 않는다. 성주사「낭혜화상탑비(朗慧和尙塔碑)」에는 단월檀越)을 계서발한위흔(季舒發韓魏昕)이라 표현하고 있다. 계(季)는 순서의 마지막을 뜻하므로 당시 서발한이 다수였음을 알려주는 좋은 사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