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7년(진평왕 49) 8월 서리가 내리고 그 이듬해 봄과 여름에 크게 기근이 들었다. 이때 궁중의 업무를 관리하는 말단 직책의 여러 사인(舍人)들이 공모하여 창예창(唱翳倉)의 곡식을 훔쳐서 나눠갖기를 모의하였다. 이 공모에 동참한 사인들 가운데에는 사량궁(沙梁宮)뿐만 아니라 직접 창예창 자체를 관리하는 책임을 지고 있는 사람까지 포함된 것으로 보인다. 검군(劍君)은 화랑의 문도 출신이라는 자부심을 내세워 홀로 훔치자는 논의에 동참하기를 거부하다가 결국 죽임을 당하였다.
이처럼 창예창 관련 기록은『삼국사기(三國史記)』열전 검군전에서만 보인다. 검군전의 내용으로 미루어 창예창은 삼국통일 이전 왕실에 직속한 창고로서 곡물을 저장하는 곳이었다. 신라시대 당시 창고는 여러 궁마다 두어졌다. 특히 검군이 사량궁을 관리하는 말단직인 사인이었다는 기록으로 보아 창예창은 사량궁 소속의 창고였음이 분명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