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성왕은 786년(원성왕 2) 자신의 즉위과정에서 경쟁하다가 실패해 명주(溟州 : 지금의 강원도 강릉)로 퇴거한 김주원을 명주군왕으로 책봉하고 명주 일대를 그의 식읍(食邑)으로 하사하였다.
그것의 배경에는 원성왕의 왕권강화와 관련된다. 우선 명주가 김주원의 선대(先代)부터 연고권이 있는 곳으로 그가 자진해 퇴거한 지역이고, 또 신라 변방의 공적 군사력이 기능을 상실해 가는 상황에서 중앙정부로서는 당시 대외관계상 동북방(東北方)문제의 위기를 벗어나기 위해 김주원을 명주군왕에 책봉해 정치사회적으로 예우와 신분보장을 해 줌과 더불어 자신을 신라 중앙정부의 군주(君主)로 인정하게 한 것이다.
이에 김주원 세력은 명주군왕의 봉작과 아울러 식읍을 경제적 기반으로 하면서, 명주지역에 성(城)을 쌓아 치소(治所)를 마련하고 ‘명주군국(溟州郡國)’이란 독자적 국호(國號)를 갖기도 하였다.
그리고 독자적인 통치조직과 군사기반을 가지고 신라의 북방수비와 일본의 동해안 일대의 침공을 대비하면서 발해와 일본의 동해연안 해로를 통한 통교(通交)를 견제하는 역할을 담당하였다.
이러한 특수구역의 관리자적 지위는 김주원의 자손(子孫)이 계속 보유해갔다. 그의 아들 종기(宗基)는 명주군왕, 종기의 아들 정여(貞茹)는 명원공(溟源公)으로 책봉되었고, 정여의 아들 양(陽)은 명원군왕(溟源郡王)으로 추봉(追封)되었다.
한편 명주군왕의 작위는 김주원계의 분지화(分枝化)를 초래하였다. 원성왕의 즉위 이후 김주원계 내의 각 소가계는 동향을 달리하였다.
이는 처음에는 무열왕계(武烈王系)의 왕위상실과 원성왕의 회유책에 의한 것이었지만, 점차 원성왕계 내에서 인겸계(仁謙系)와 예영계(禮英系)의 갈등을 자신들의 이해관계에 이용하려 했던 것에도 영향을 받았다.
특히 명주군왕의 작위를 김주원의 직계자손(直系子孫)이 계속 갖게됨으로써 이에서 벗어난 가계의 인물들은 극단적인 방법인 반란을 통해 보다 나은 지위를 획득고자 했으나 실패하였다. 그리하여 김주원계 후손들은 자신이 속한 소가계의 이익추구를 도모한 결과 가계의 분지화에 따라 세력이 분산되었다.
명주군왕은 신라 하대 초기 봉작호의 하나로서 김주원과 그 직계는 이 작위를 가지게 되었다. 이는 신라 중앙정부와는 별도의 독자적인 통치체제를 유지하는 지방정부로서, 그리고 독자적인 국호를 가진 제후국(諸侯國)이므로, 일종의 봉건제의 유형을 띤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