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주(武州) 장사현(長沙縣)의 부수(副守 : ‘制守’의 誤記라고 함.)를 지내고 병부시랑·전중대감(殿中大監)을 역임했으며, 자금어대(紫金魚袋)를 하사받았다. 역임한 관직으로 보아 육두품 신분으로 여겨진다. 그는 821년(헌덕왕 13) 신라인으로는 처음으로 당나라의 빈공과(賓貢科)에 합격한 김운경(金雲卿)과 동일인이라는 견해가 있다. 이뿐만 아니라 김언경과 김운경은 양자의 활동 상황을 감안할 때 별개의 인물로 보아야 할 것이며, 경명왕비장사택(長沙宅)의 조부인 이찬(伊飡)김수종(金水宗) 또는 김수종(金遂宗, 邃宗)과 동일 인물일 가능성이 높다는 견해도 있다.
일찍이 장사현부수로 있을 때 보조선사(普照禪師)체징(體澄)이 당나라에서 귀국하자 헌안왕의 명을 받아 다약(茶藥)을 받들고 가서 그를 맞았다. 그 뒤 체징이 가지산파(迦智山派)를 개창한 후에는 재가제자(在家弟子)가 되어 사재(私財)로 철 2,500근을 사서 비로자나불(毘盧舍那佛) 한 구를 만들어 봉헌(奉獻)하는 등 선종구산 중 가지산파의 후원에 크게 힘썼다.
글씨를 잘 써 당대의 명필이라 불렸으며, 특히 행서(行書)에 능했는데 필법은 저수량(褚遂良)을 본받았다고 한다. 「보림사보조선사창성탑비(寶林寺普照禪師彰聖塔碑)」는 김원(金遠)과 함께 쓴 것인데, 처음에 김원이 머리에서 7행까지 해서(楷書)로 쓴 뒤 그만두자, 이어서 그가 7행의 선(禪)자 이하를 행서로 썼다. 그 필세는 “철근(鐵筋)과 같고 운치(韻致)가 횡일(橫溢 : 물이 가로 넘쳐흐르는 것)하는 신품(神品)이다.”라고 평가받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