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거산 운문사 ( )

불교
유적
경상북도 청도군 운문면 호거산(虎踞山)에 있는 삼국시대 신라의 승려 원광이 머물렀던 사찰.
이칭
이칭
대작갑사(大鵲岬寺), 작갑사(鵲岬寺), 운문선사(雲門禪寺)
유적/건물
소재지
경상북도 청도군 운문면 호거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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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요약

운문사는 삼국시대 신라의 원광이 머물렀던 사찰이다. 원광은 근처 가슬갑사에서 화랑에게 세속오계를 주었다. 고려시대에는 12세기에 원응국사가 머물며 중창하였다. 조선 후기 18세기에는 설송 연초가 후학들을 가르치며 중창하였다.

정의
경상북도 청도군 운문면 호거산(虎踞山)에 있는 삼국시대 신라의 승려 원광이 머물렀던 사찰.
역사적 변천

대한불교조계종 제9교구 본사인 동화사(桐華寺)의 말사이다. 557년(진흥왕 18)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한 주1이 수행하다가 560년(진흥왕 21)부터 건물을 지어 ‘대작갑사(大鵲岬寺)’라는 이름으로 창건하였다. 이어서 동쪽에 가슬갑사(嘉瑟岬寺), 서쪽에 대비갑사(大悲岬寺), 남쪽에 천문갑사(天門岬寺), 북쪽에 소보갑사(所寶岬寺)를 지었다. 이때 창건한 다섯 갑사를 오갑사(五岬寺)라고 한다.

600년(진평왕 22) 원광(542~640)주2에서 유학하고 돌아와 대작갑사에 3년간 머무르며 주3. 이후 가슬갑사로 옮겨 수행하고 있을 때 주4 귀산(貴山)추항(箒項)이 찾아와 세속인으로서 평생 동안 교훈이 될 말을 물으니 세속오계(世俗五戒)를 지어 주었다.

937년(태조 20)에는 주5에서 유학하고 돌아와 주6의 통일을 위해 왕건을 도왔던 보양(寶壤)이 중창하고 ‘작갑사(鵲岬寺)’라 하였다. 태조 왕건이 보양의 공에 대한 보답으로 오갑사에 토지 500결(結)을 하사하고 작갑사에 ‘운문선사(雲門禪寺)’라고 주7 뒤부터 ‘운문사’라고 불렀다.

1129년(인종 7) 원응국사 학일(10521144)이 만년에 운문사에 머물면서 크게 중창하였다. 그는 일찍이 대각국사 의천(10551101)천태종을 세우고 주8승려들에게 승적을 천태종으로 옮기도록 유도할 때 선문을 지킨 바 있었다. 예종이 즉위한 후 삼중대사가 되었고, 1108년(예종 3) 선사, 1114년(예종 9) 대선사가 되었으며, 1122년(인종 즉위) 왕사에 올랐다. 입적 후 국사에 추대되고 운문사에 그의 비석이 세워졌다.

조선 전기 운문사에 관한 기록은 보이지 않고, 임진왜란 이후 중창 사실이 확인된다. 1654년(효종 5) 화재로 전각이 소실된 후 곧바로 재건되었는데, 당시 기록에 보이는 주9의 건축물은 금법당, 대웅전, 극락전, 동미타전, 미륵전, 동 관음전, 십육전, 향적오백, 작탑, 조전, 명월료, 만월당, 은월당, 정문, 문수전, 객실, 삼보위, 승당, 여래전, 식당, 계본료, 계월당 판전, 미랑, 소재전, 탕재방, 주10, 주11, 행랑 비각, 2기의 탑, 3기의 주12 등이다. 그리고 1678년(숙종 4)에 만세루를 주13.

18세기 전반기에 설송 연초(1676~1750)가 주석하며 중창하였다고 전하지만 구체적인 사실은 전하지 않는다. 다만 이천보가 찬술한 「설송대사비」가 운문사에 세워져 있다.

19세기에는 운악 두안이 만일염불회를 개최하면서 법당, 시왕전, 오백나한전, 종각 등 모든 건물을 새롭게 주14.

부속 암자로 절의 동쪽에 청신암(淸神庵)과 약수로 이름난 내원암(內院庵), 북쪽에 북대암(北臺庵), 동남쪽에 사리암(舍利庵), 서쪽에 호거암(虎踞庵) 등이 있다.

운문사는 1958년 비구니 전문 강원으로 선정되어 비구니 교육과 경전 연구기관으로 유명하다.

중요 국가유산

운문사에는 국가문화유산으로 보물 9점, 경상북도 유형문화유산 3점, 경상북도 문화유산자료 4점, 그리고 천연기념물 1점이 있다.

보물로는 주15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되는 동 · 서 삼층석탑, 청도 운문사 금당 앞 석등, 석조 사천왕상이 있고, 고려 전기에 조성된 석조 여래 좌상, 청도 운문사 동호(銅壺), 원응국사비, 조선 후기에 조성된 대웅보전, 비로자나삼신불회도, 대웅보전 관음보살 · 달마대사 벽화가 있다.

경상북도 유형문화유산으로는 소조비로자나불좌상, 사리기(舍利器), 만세루(萬歲樓)가 있다.

경상북도 문화유산자료로는 대웅보전 앞 석등, 설송대사비, 내원암 석조아미타불좌상, 내원암 산신도가 있다.

천연기념물로는 운문사 입구에 있는 처진소나무가 있다.

참고문헌

원전

『삼국유사(三國遺事)』
『조선사찰사료(朝鮮寺刹史料)』(조선총독부, 1911)
『운문사지(雲門寺誌)』(성보문화재연구원, 2018)

단행본

권상로 편, 『한국사찰전서(韓國寺刹全書)』(동국대학교출판부, 1979)

인터넷 자료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https://www.heritage.go.kr)
주석
주1

정신이 신령에 통하여 모르는 것이 없이 잘 아는 승려. 우리말샘

주2

581년에 중국 북주(北周)의 양견(楊堅)이 정제(靜帝)의 선양(禪讓)을 받아 세운 왕조. 581년에 개국하였으며, 589년에 진(陳)나라를 합쳐 중국을 통일하였으나, 618년에 당나라 고조 이연(李淵)에게 망하였다. 우리말샘

주3

낡은 건물을 헐거나 고쳐서 다시 짓다. 우리말샘

주4

신라 때에 둔, 청소년의 민간 수양 단체. 문벌과 학식이 있고 외모가 단정한 사람으로 조직하였으며, 심신의 단련과 사회의 선도를 이념으로 하였다. 우리말샘

주5

618년에 중국의 이연(李淵)이 수나라 공제(恭帝)의 왕위를 물려받아 세운 통일 왕조. 도읍은 장안(長安)이며, 중앙 집권 체제를 확립하고 문화가 크게 융성하였으나, 안사(安史)의 난 이후 쇠퇴하여 907년에 주전충(朱全忠)에게 망하였다. 우리말샘

주6

통일 신라 말기의 신라, 후백제, 후고구려를 통틀어 이르는 말. 우리말샘

주7

임금이 사당(祠堂), 서원(書院), 누문(樓門) 따위에 이름을 지어서 새긴 편액을 내리다. 우리말샘

주8

참선으로 자신의 본성을 구명하여 깨달음의 묘경(妙境)을 터득하고, 부처의 깨달음을 교설(敎說) 외에 이심전심으로 중생의 마음에 전하는 것을 종지(宗旨)로 하는 종파. 중국 양나라 때 달마 대사가 중국에 전하였다. 우리나라에는 신라 중엽에 전해져 구산문이 성립되었다. 우리말샘

주9

승려가 살면서 불도를 닦는 곳. 우리말샘

주10

좌선하는 집. 보통 절 안의 왼쪽에 있다. 우리말샘

주11

큰 종을 달아 두기 위하여 지은 누각. 우리말샘

주12

나무로 만든 등잔걸이. ⇒규범 표기는 ‘광명두’이다. 우리말샘

주13

절이나 왕궁 따위를 보수하거나 고쳐 짓다. 우리말샘

주14

건축물 따위의 낡고 헌 것을 손질하며 고치다. 우리말샘

주15

신라가 백제, 고구려를 무너뜨리고 삼국을 통일한 676년 이후부터 935년까지의 시기. 우리말샘

집필자
이종수(순천대학교 사학과 교수, 조선불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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