염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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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정보
고대사
인물
남북국시대 통일신라의 무주별가를 역임한 장수.
이칭
이칭
염장(閻丈), 염문(閻文)
인물/전통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미상
사망 연도
미상
출생지
무주(武州)
내용 요약

염장은 남북국시대 통일신라의 무주별가를 역임한 장수이다. 생몰년은 미상이다. 장보고 휘하의 무장으로, 838년 장보고가 왕위계승분쟁에서 패배하여 청해진에 피신해 있던 김우징을 도와 반격군을 파견할 때 이순행·정년 등과 5000명의 군사를 이끌고 참여하여 신무왕 즉위에 일익을 담당했다. 이후 장보고가 자신의 딸을 문성왕의 왕비로 세우려고 중앙정부와 갈등을 빚자 중앙정부측에 가담했다. 염장은 장보고의 막하에 거짓 투항했다가 주연석상에서 그를 암살하고 돌아갔다. 그 대가로 아간(아찬)에 임명되어 이어진 장보고세력의 저항을 진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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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남북국시대 통일신라의 무주별가를 역임한 장수.
개설

무주(武州)사람이다. 『속일본기(續日本紀)』에는 염장(閻丈) · 염문(閻文)으로 기술되어 있다. 장보고(張保皐)의 휘하에서 무장으로 활약하였다.

생애와 개설

838년(민애왕 1) 장보고가 수도 경주에서의 왕위계승분쟁에서 패배하여 청해진(淸海鎭 : 지금의 전라남도 완도)에 피신해 와있던 김우징(金祐徵)을 도와 반격군을 파견할 때, 염장은 이순행(李順行) · 정년(鄭年) 등과 함께 5,000명의 군대를 이끌고 출정하였다. 무주 철야현(鐵冶縣 : 지금의 전라남도 나주)에서 중앙군을 격파하고, 다시 달구벌(達句伐 : 지금의 대구)에서 김흔(金昕)이 지휘하는 민애왕의 군대를 대파하고, 수도에 입성해 김우징을 신무왕으로 즉위하게 하는데에 일익을 담당하였다. 그 공으로 무주별가(武州別駕)에 제수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뒤에 장보고의 딸을 문성왕의 왕비로 맞아들이는데 대한 신라조정의 반대를 계기로 벌어진 장보고 세력과 중앙정부간의 대결에서 염장은 중앙정부측에 가담하게 되었다. 그는 거짓으로 다시 장보고의 막하에 투신하였다. 장보고가 그를 의심하지 않고 받아들여 주연을 베풀었다. 그는 주연석상에서 틈을 타 장보고를 암살하고 돌아갔다. 그 공으로 중앙정부로부터 아간(阿干)의 관계를 받게 되었다.

장보고가 죽은 뒤, 그의 부장이었던 이창진(李昌珍) 등이 청해진을 근거로 계속 저항을 기도하자, 염장은 다시 군대를 이끌고 가서 이를 평정하였다. 그리고 이창진 등이 일본에 파견한 청해진의 무역선과 그 책임자였던 이충(李忠) 등에 대해서 염장은 이소정(李少貞) 등을 일본정부에 보내 압송해줄 것을 요청하기도 하였다. 이소정은 장보고의 부하였는데 이때는 염장의 휘하에 투신한 뒤였다. 그러나 염장의 요구를 일본정부가 거부하였다. 이 후, 염장의 동정에 관한 기록은 전해지는 바가 없다. 아마도 851년(문성왕 13) 청해진 주민들을 벽골군(碧骨郡)으로 강제이주시킬 때까지 청해진방면의 평정사업에 종사했을 것으로 보인다.

참고문헌

『삼국사기(三國史記)』
『속일본기(續日本紀)』
「고대(古代)의 무역형태(貿易形態)와 나말(羅末)의 해상발전(海上發展)에 취(就)하야」(김상기, 『진단학보』 1, 1934)
집필자
노태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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