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질토기 ()

선사문화
물품
실내가마에서 900℃ 정도의 고온에서 구워 낸 원삼국시대 영남 지역에서 유행한 회색의 약간 무른 토기.
이칭
이칭
연질토기, 회도(灰陶)
물품
재질
용도
토기
제작 시기
원삼국시대
내용 요약

와질토기(瓦質土器)는 실내가마에서 900℃ 정도의 고온에서 구워 낸 원삼국시대 영남 지역에서 유행한 회색의 약간 무른 토기이다. 태토의 정선화, 타날성형, 환원염 소성으로 구워지는 점 등이 와질토기의 특징으로 인정되며, 대표적인 기종으로는 주머니호, 조합우각형 파수부장경호, 외반구연옹, 파수부호, 장동호, 타날문단경호가 있다. 와질토기 기원은 전국시대 회도 혹은 낙랑토기가 남하하면서 전래되었다는 외부기원설이 오랫동안 받아들여졌다. 최근에는 낙랑군 설치 이전에 고조선 토기 문화의 영향으로 자체적으로 발생했다는 설이 대두되고 있다.

목차
정의
실내가마에서 900℃ 정도의 고온에서 구워 낸 원삼국시대 영남 지역에서 유행한 회색의 약간 무른 토기.
개념

와질토기란 밀폐된 가마에서 구워진 주1의 일종인데, 원삼국시대의 진 · 변한 지역 즉 영남 지역에서 널리 유행한 토기류를 일컫는다. 흔히 정선된 점토로 성형하고 민무늬토기보다 약간 높은 900℃ 정도의 고온에서 구워 낸 토기인데 기본적으로 회색 기조로 발색한다.

초기 철기시대 이전의 민무늬토기보다는 투수성이 현저히 줄어든 토기류이지만 신라 · 가야토기와 같은 주2의 수준에는 미치지 않는다. 와질토기라는 이름이 붙여진 것도 그 구워진 정도가 기와류와 비슷한 점이 주목된 결과이다.

동아시아 도자사의 관점에서 보건대 와질토기와 같은 회도류는 이미 중국 대륙에서 신석기시대에 등장한다. 이후 서주시대나 춘추전국시대는 물론 진한대까지도 회도류가 토기 문화의 중심을 이루었다.

이러한 회도 문화는 북방의 주3와 고조선 사회에도 채용되었으며 이윽고 한반도 남부 지역으로도 확산되었다. 다만 일본열도에서는 고총고분이 조영되는 고분시대까지도 회도 문화가 인정되지 않는다.

한반도 영남 지역에서 유행한 와질토기의 중요한 속성으로는 정선된 주4, 타날성형, 녹로성형이라는 요소가 거론된다. 그런데 정선된 태토라는 기술 속성은 이미 청동기시대의 주5나 초기 철기시대의 흑도장경호에도 적용되기 때문에 와질토기를 인정하는 절대 기준이 아니다. 다호리나 팔달동을 위시한 여러 유적에서 출토된 초기 단계 와질토기에는 석사립이 혼입된 토기도 많다.

토기를 안팎에서 두드려서 성형하는 타날기법도 와질토기에서 인지되는 중요한 속성이다. 그러나 이전의 점토대토기와 송국리 토기 등의 민무늬토기에도 타날성형이 채용되기 때문에 와질토기만의 기술 속성이라고는 할 수 없다.

다만 노끈문 타날설형은 와질토기에 처음으로 채용된다. 토기 바닥 부분에서 관찰되는 2차 타날 조정과 태토의 정선화, 그리고 환원염 소성으로 구워지는 점 등이 복합적으로 인정되는 토기류가 와질토기이다.

기원

한반도 남부 지역에서 와질토기의 기원 문제는 고고학계의 오래된 논쟁 사항이었다. 많은 연구자가 서북한 지역의 낙랑토기를 기원으로 이해했는데 전국시대 회도에서 유래한 토기라는 주장도 있었다. 이는 와질토기가 마한 지역, 즉 한반도 중부 지역에 먼저 정착했다가 다시 진 · 변한 지역으로 이입되었다는 주장이었다. 그러나 최신 연구는 오히려 영남 지역에서의 출현이 빠르다는 쪽으로 수렴되고 있다.

진 · 변한 지역 즉 영남 지역 사람들이 최초로 중국계 회도에 노출되는 시기는 이 지역이 요동반도와 한반도 서북 지방은 물론 일본열도와 오키나와까지 연결되는 국제 교역망에 편입되는 시기까지 올라갈 가능성이 있는데 이는 낙랑군 설치 이전일 가능성이 크다.

실제로 성주 예산리 유적에서는 서기전 2세기 후반으로 편년되는 무덤에서 완성도가 높은 와질토기가 출토된 바 있다. 울산 달천 유적의 5, 6호 수혈과 달성 평촌리 유적 등지에서는 타날문이 채용된 이른 시기의 와질토기가 출토되었다.

한편 다호리 40호와 팔달동 41호에서 출토된 산화염 소성이면서 바닥 부분이 납작한 단경호는 그 제도법(製陶法)이 민무늬토기에 기초한다. 즉 재지의 민무늬토기 제작 공인이 이입된 회도를 모방하여 생산하기 시작한 것이 와질토기임을 웅변하는 고고학적 증거이다.

처음 생산된 와질토기 단경호에는 노끈무늬 타날이 본격적으로 채용된 이후에도 굵은 모래가 섞이는 경향이 있는데 이 역시 민무늬토기 이래의 제작 전통과 관련이 있다.

와질토기를 대표하는 기종은 주머니호, 조합우각형 파수부장경호, 외반구연옹, 파수부호, 장동호, 타날문단경호 등이 있다. 이 중에서 중국의 회도에서 기형적 기원이 구해지는 기종은 타날문단경호가 유일하다. 와질토기 문화는 주머니호가 유행하는 전기와 노형토기가 등장하는 후기로 나누어지는데, 타날문단경호 등은 형식 변화를 거치며 전기를 거쳐 후기까지 유행한다.

와질토기의 하나인 외반구연옹은 선행하는 초기 철기시대의 점토대토기에서 변화된 기종이다. 처음에는 바닥 부분 점토판을 만들고 테쌓기로 성형하지만 차츰 바닥이 둥글게 만들어지고 아가리의 점토대가 홑구연으로 바뀐다. 타날성형이 현저해지고 밀폐가마에서 구워져서 회색으로 바뀌어 간다.

조합우각형 파수부장경호는 노천에서 구웠던 흑도장경호에서 파생된 기종이다. 민무늬토기 단계에서는 평저굽에 테쌓기가 성형의 기본이다. 차츰 바닥 부분이 둥글어지고 태토가 정선되며 첨가물이 줄어들고 아가리 조정에 회전력이 이용된다. 여기에 타날과 밀폐가마 소성이 더해진다. 와질토기 전기 단계에서 이미 노끈문타날과 회전력을 이용한 횡침선 시문이 추가된다.

주머니호는 와질토기를 대표하는 기종으로 주목받아 왔으며 특히 우리나라 고고학에서 초기 철기시대와 원삼국시대를 가르는 표지 토기로 취급받았다. 일찍이 이 토기를 외부에서 이입된 새로운 토기 기종으로 취급하기도 했지만, 이 역시 초기 철기시대의 점토대토기에서 비롯된 기종이다.

주머니호는 형태 변화의 방향성이 뚜렷하기 때문에 원삼국시대의 토기편년에서 가장 기준이 되었던 토기 기종이다. 원래 민무늬토기였던 주머니호는 바닥이 둥글게 바뀌면서 태토의 정선화가 진행된다. 아울러 환원염으로 소성되어 일반적으로 회백색을 띠게 된다.

와질토기에는 완형토기도 있다. 이 토기도 한때 중국 토기의 영향을 받아 새롭게 등장한 기종으로 이해되었으나, 한반도 초기 철기시대에 이미 존재하던 기종이다. 대구 팔달동 유적 등에서 발굴된 초기 철기시대의 민무늬토기 완은 납작한 바닥에 고운 모래가 섞인 형태이다.

그렇지만 바닥이 둥글게 바뀌고 태토가 정선되고 환원염으로 소성되는 변화가 관찰된다. 창원 다호리 57호에서 출토된 완형토기는 바닥에서 중국 회도의 특징인 ‘사절흔’ 즉 실로 바닥을 잘라 낸 흔적이 관찰된다.

양이부호 역시 초기 철기시대를 거쳐 원삼국시대까지 사용된 기형이다. 초기 철기시대의 양이부광구호는 태토에 석사립의 혼입이 많으며 성형에 무문타날이 채용된 경우가 있고 산화염으로 소성된다. 와질토기화는 다른 토기와 마찬가지이다.

이외에도 양이부장동호도 초기 철기시대에서 원삼국시대에 걸쳐 사용된 기종이다. 와질토기화가 진행되기 전의 토기는 석사립의 혼입이 현저하고 산화염으로 소성되는 것이 일반적이다. 또한, 동체에 비해서 좁지만 납작바닥의 굽을 가지고 아가리가 비교적 넓게 외반하지만 회전이 채용되어 이루어지는 마무리는 아니다.

이 토기의 와질토기화는 태토의 정선화가 더딘 특징이 있다. 그리고 구연단의 조정이 끝난 다음에 토기를 뒤집어서 바닥 부분을 손질한 것으로 드러난다. 이 토기는 토관처럼 길게 성형하다 아가리 조정이 완료되면 이를 녹로 위에 뒤집어 놓고 테쌓기로 긴 몸체를 만들다가 ‘조으기 기법’으로 바닥 부분을 마무리하는 특징이 있다.

타날문단경호는 초기 철기 단계에는 없었던 기종으로 외부 토기 문화의 영향으로 새로 등장한 기종일 가능성이 높다. 중국 대륙에서는 신석기시대 이래로 유행했던 토기 기형이다. 대개 노끈무늬 타날로 인정되고 아가리의 조정에 회전이 채용되며 환원염으로 소성되는 것이 일반적이다.

성형 과정에서 사용된 내박자는 모두가 민무늬인데 이는 서북한 지역의 낙랑 타날문단경호가 나이테흔을 남긴다는 점에서 확연한 차이가 인정된다.

의의 및 평가

우리나라 고고학에서 와질토기 연구는 오랫동안 ‘낙랑토기 영향설’의 범주에서 이루어져 왔다. 그러나 2000년대에 서북한 지역의 낙랑토기에 대한 본격적인 분석이 이루어지면서 그 계보 관계가 보다 분명히 밝혀졌다. 특히 진 · 변한 지역의 와질토기와 낙랑토기의 상사성과 상이성이 밝혀지면서 그 출현 시기에 관한 문제도 뚜렷해지게 되었다.

이와 관련된 최신 연구는 진 · 변한의 와질토기가 낙랑토기가 성립하기 이전의 고조선토기 문화의 영향으로 자체적으로 발생한 토기 문화라는 주장에 힘을 더하고 있다. 고조선 단계에 중국 전국시대 회도 문화를 수용한 토기들이 등장하고 이 토기 문화의 영향 아래에서 진 · 변한의 민무늬토기 제작 공인들이 지역에서 생산하기 시작한 토기가 와질토기라는 이해이다.

참고문헌

논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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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昌熙, 「木棺墓 副葬土器의 形式學的 檢討」(『石軒 鄭澄元敎授 정년퇴임기념논총』,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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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석
주1

잿빛을 띤, 거칠게 만든 토기. 중국에서 신석기 시대부터 청동기 시대에 걸쳐 썼다.    우리말샘

주2

진흙으로 만들어 볕에 말리거나 약간 구운 다음, 유약을 입혀 다시 구운 그릇. 기초 재료가 되는 흙이 중간 강도이며 불투명성을 띤다. 굽는 온도는 1,100~1,250℃이다. 주로 욕조, 건축 자재, 장식품, 그릇 따위로 쓰인다. 넓은 의미로는 자기, 질그릇 따위도 포함한다.    우리말샘

주3

중국의 이민족인 오호(五胡) 가운데 진(秦)나라ㆍ한(漢)나라 때에 몽골고원에서 활약하던 기마 민족. 기원전 3세기 말에, 묵돌 선우가 모든 부족을 통일하여 북아시아 최초의 유목 국가를 건설하고, 최성기(最盛期)를 맞이하였으나, 한나라 무제의 잦은 침공으로 쇠약해져, 1세기경 남북으로 분열되었다.    우리말샘

주4

질그릇이나 도자기의 밑감이 되는 흙.    우리말샘

주5

그릇의 겉에 붉은 칠을 바르고 문질러 닦아서 붉고 반들반들하게 만든 토기(土器). 신석기 시대 및 청동기 시대의 유물이다.    우리말샘

관련 미디어 (1)
집필자
정인성(영남대학교 문화인류학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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