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산입봉리고분군(鳳山立峯里古墳群)은 북한 황해북도 봉산군에 있는 대방군의 무덤으로 알려진 덧널무덤이다. 1917년 야쓰이 세이이쓰에 의해 발굴되었으며, 이를 입봉리 9호고분이라고 칭한 것으로 보아 입봉리에 있는 고분에 일련번호를 부여했던 것으로 보인다. 출토된 유물은 모두 토기류인데 그 중에서 석영혼입계 백색토기 항아리가 출토된 점에서 유적의 연대는 대방군 설치 이전의 시기인 1세기 중엽으로 소급된다.
봉산입봉리고분군은 행정구역상 지금의 황해북도 은파군 초구리에 속한다. 1914년 행정구역 조정에서 봉산군 와현면의 수각동 · 복동 · 중보동 · 창대동 · 평산동을 병합하여 초와면 아래에 입봉리를 두었다. 광복 후 1952년 군면리 대폐합에 따라 은파군 초구리로 편입시켰다.
입봉리에는 여러 기의 낙랑 시기 고분이 산재하는데, 1917년 5월에 그 중 1기가 발굴 조사되었다. 발굴 조사를 담당한 것은 총독부의 촉탁이자 고적 조사위원이었던 야쓰이 세이이쓰〔谷井濟一〕였다. 발굴 조사된 고분을 입봉리 9호고분이라고 한 것을 보면, 조사 당시 조사원들이 입봉리에 있는 고분들에 일련번호를 부여했을 가능성이 크다.
조사 결과 고분은 홑묻기, 즉 단장(單葬)의 덧널무덤으로 드러났다. 장축을 남북으로 둔 고분이며 덧널의 북쪽 공간에 토기들이 밀집 부장되었다. 그 나머지 남쪽 공간은 비어 있는 상태였고 덧널의 흔적도 남아 있지 않았다. 토기가 부장된 공간이 전용 부장곽(副葬槨: 부장품을 넣는 별도 공간)이었으며, 그 남쪽에 피장자를 매장했을 것으로 추측된다.
고분은 동쪽에서 서쪽으로 흘러내리는 자연 구릉의 자락에 구축한 것으로 봉분이 인정된다. 봉분의 서쪽은 자연 구릉의 말단부와 연결되기 때문에 더욱 높아 보이는 형태이다. 봉분의 동쪽은 약간 낮아지다가 평탄면을 이룬다.
부장 칸에서 출토된 유물은 모두 토기류이다. 대형의 석영혼입계의 백색토기 항아리가 2점 확인되고, 화분형토기의 저부와 구연부 조각도 출토되었다. 니질계의 직립하는 아가리를 가지는 납작바닥토기도 발견되었다. 화분형토기의 바닥 굽이 분리된 채 발견된 것을 보면, 원래는 화분형토기 2점을 부장했던 것으로 추측된다.
석영혼입계 백색토기는 S자 모양의 구연부가 붙은 대형토기로 배가 부른 형태의 저장용으로 특화된 토기이다. 주름무늬가 있는 토기 조각도 백색토기의 구연부일 가능성이 높다. 이들은 원래 낙랑토기를 대표하는 기종으로 알려졌으나 최신 연구에 의해 중국 산둥반도에서 생산된 수입 토기임이 밝혀졌다.
토기 그 자체를 상품으로 수입했다기보다는 내용물이 수입품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유사한 백색토기에서 생선의 뼈 등이 많이 출토되는 것을 참고하면 젓갈류 등의 보존식품을 담는 용기였을 가능성도 점쳐진다.
화분형토기는 굽이 달리고 아가리가 바깥쪽으로 벌어진 형태로 분리되어 조각으로 출토되었지만, 흔히 변형 화분형토기로 불리는 기형으로 보인다. 전형 화분형토기에 비해 출현 시기가 늦은 것으로 알려진다. 직립 구연의 니질계 짧은목항아리는 바닥이 편평한 기형이다. 제작 기법의 측면에서 평양 지역에서 출토되는 니질계 토기와 완전히 일치한다.
고분의 시기는 백색토기 항아리의 형태가 참고된다. 즉 이 토기는 그 상한이 1세기 대로 정해지며 2세기까지 유행했던 기형이다. 변형 화분형토기도 그 시기가 1세기 중엽 이후로 정해진다.
은파 지역과 봉산 지역은 원래 낙랑군과 대방군 시기의 고분과 토성이 분포하는 공간이다. 사리원역 부근에서 대방 태수 장무이묘(張撫夷墓)가 발견되고 멀지 않은 곳에서 고당성, 즉 지탑리토성이 발굴되면서 이 지역을 대방군치(帶方郡治)가 놓였던 공간으로 믿는 연구자가 많았다.
그러나 봉산입봉리고분군은 시기적으로는 대방군이 설치되기 이전의 고분이라고 할 수 있다. 최근 연구에서 지탑리토성이 유력한 대방군치의 후보지임을 증명하였던 대방 태수 장무이묘의 조영 주체가 대방군이 아니라 4세기 대 중반의 고구려일 가능성이 크다는 것이 밝혀졌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은파군은 봉산군과 함께 대방군과 연관된 지역이라는 황해도 지역에 대한 고고학적인 정황에 대하여 재고해 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