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산 지탑리 유적

  • 역사
  • 유적
  • 석기
북한 황해북도 봉산군에 있는 석기시대 이후 팽이형토기·도끼·그물추 등이 출토된 집터.
집필 및 수정
  • 집필 1995년
  • 한영희 (국립중앙박물관, 고고학)
  • 최종수정 2023년 07월 18일

본 항목의 내용은 해당 분야 전문가의 추천으로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 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내용 요약

봉산 지탑리 유적은 북한 황해북도 봉산군에 있는 신석기시대와 청동기시대의 움집터이다. 재령강의 한 지류인 서흥천변에 위치해 있으며 2개의 지점이 발굴되었다. Ⅰ지구에서는 신석기시대 움집터 1기, Ⅱ지구에서는 신석기시대 움집터 2기와 전형적인 팽이형토기문화의 집터인 청동기시대 움집터 1기가 발굴되었다. 이 유적의 신석기문화가 전파·이주하여 한강변의 암사동·미사리문화에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본다. 또한 돌보습, 돌낫, 탄화곡물 등의 출토 유물을 통해 한반도 최초의 농경 가능성을 확인할 수 있다.

정의

북한 황해북도 봉산군에 있는 석기시대 이후 팽이형토기·도끼·그물추 등이 출토된 집터.

개설

유적은 재령강의 한 지류인 서흥천변(瑞興川邊)에 위치한다. 1957년 지탑리에 있는 대방군(帶方郡) 토성 안의 한 지점(Ⅰ지구)과 이곳에서 남동쪽으로 750m 떨어져 있는 또 한 지점(Ⅱ지구)이 발굴되었다.

Ⅰ지구의 층위는 표토층 · 고대문화층 · 신석기문화층으로 되어 있다. 신석기문화층에서 움집터[豎穴住居址] 1기가 조사되었다.

Ⅱ지구에서는 청동기시대의 팽이형토기[角形土器] 문화층이 확인되었고, 신석기시대 움집터 2기(제2 · 3호), 청동기시대 움집터 1기(제4호)가 발굴되었다.

내용

신석기시대 움집터의 구덩 깊이는 40∼60㎝이며 형태는 네모 혹은 모줄임네모[抹角方形]로서 바닥은 진흙을 펴 다졌다.

제1호 움집터는 바닥 외에 벽도 진흙으로 덧대고 다져놓았다. 바닥의 중앙부에는 강돌로 테를 둘러 만든 화덕자리가 있다. 그 주변에는 토기 밑을 잘라버리고 거꾸로 박아놓은 저장용 토기가 마련되어 있다.

제2 · 3호움집터에서는 바닥의 네 가장자리를 비롯한 곳곳에서 기둥구멍이 조사되었다. 벽면의 한 곳에는 계단형 또는 경사형의 출입구가 설치되어 있다.

지탑리 움집터와 비슷한 축조방식의 움집터는 평안남도 용강 궁산 조개더미(弓山貝塚), 서울 암사동 유적 등 중 · 서부지방의 신석기시대 전기 유적에서 조사된 바 있다.

토기는 바탕흙에 활석과 석면이 섞여 있는 뾰족바닥의 장란형토기(長卵形土器)가 대부분이나 납작바닥토기도 약간 출토되었다. 뾰족바닥 장란형토기에는 아가리 · 몸통 · 바닥에 서로 다른 무늬가 새겨져 있다.

아가리에는 점줄무늬 · 점줄밀집무늬[點列集線文] · 손톱무늬[爪文] · 물결점줄무늬[波狀點線文] · 무지개무늬[重弧文] 등이, 몸통에는 세로생선뼈무늬[縱走魚骨文] · 타래무늬 · ‘W’대무늬, 바닥에는 짧은빗금무늬[短斜線文] · 가로생선뼈무늬[橫走魚骨文]가 주로 새겨져 있다.

석기로는 삼각형의 미늘식[逆刺式] 활촉과 창끝 · 도끼 · 맷돌[碾石] · 숫돌[砥石] · 그물추 · 망치 · 공이[敲石] · 보습 · 낫 등이 출토되었다. 제2호 움집터에서 피 또는 조로 보이는 탄화곡물이 3홉 정도 출토되어 한반도 최초의 농경 가능성을 시사하고 있다.

청동기시대 움집터는 동서 4m, 남북 5∼6m의 규모로서 바닥은 5㎜ 정도의 점토를 펴 다진 뒤 불로 구워 만든 전형적인 팽이형토기문화의 집터이다.

토기들은 이중아가리에 짧은 빗금을 새긴 항아리와 독 형태의 팽이형토기로서 바탕흙에는 모래 · 석면 · 활석 등이 섞여 있다. 석기로는 도끼 · 피홈돌검[有血溝石劍] · 슴베[有莖]살촉 · 별도끼 · 돌돈[石貨] · 맷돌 · 숫돌 · 반달돌칼(半月形石刀) 등이 출토되었다.

지탑리의 신석기문화는 신석기시대 전기의 전형적인 모습으로 북으로는 궁산 조개더미, 남으로는 한강변의 암사동 · 미사리문화와 한 문화영역을 이루고 있다. 특히, 한강변의 신석기문화는 이 문화의 전파 · 이주에 의해 성립된 것으로 생각된다.

제2호 움집터에서 출토된 돌보습 · 돌낫과 탄화곡물은 그 당시 주민의 경제생활이 수렵 · 어로 외에 이미 원시적인 농경에도 바탕을 두고 있었음을 알려주는 중요한 유물이 되고 있다.

의의와 평가

팽이형토기문화는 출토된 유물상에서 볼 때 팽이형토기로서는 이른 시기에 형성된 것이 아닌 것으로, 신석기문화가 소멸된 뒤 약간의 공백기를 거친 뒤에 다시 청동기시대 팽이형토기인이 옮겨와 살았던 것으로 생각된다.

참고문헌

  • - 「한반도중·서부지방(韓半島中·西部地方)의 신석기문화」(한영희, 『한국고고학보(韓國考古學報)』 5, 1978)

  • - 「지탑리유적발굴중간보고 Ⅰ·Ⅱ」(도유호·황기덕, 『문화유산』 57-5·6, 1957)

  • - 『韓國の考古學』(金廷鶴, 河出書房新社, 19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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