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용 요약
낙랑고분은 고대 한사군의 중심지인 낙랑군에서 조성되었던 무덤이다. 대동강 유역에서 확인되는 고분으로 널무덤[木棺墓]와 덧널무덤[木槨墓], 벽돌방무덤[塼室墓] 등이 있다. 특히 평양 근교 토성리에는 1,300여 개의 고분이 산재해 있다. 같은 시기 한반도에 존재했던 국가들의 묘제와는 현저히 다른 특징을 보이며 중국 한나라 문화를 대변하는 고분이다. 토기·동기·철기·도기(陶器)·옥기(玉器)·목기(木器)·칠기(漆器)·장신구·문방구·인(印)·명기(明器) 등 다양한 껴묻거리가 발굴되었다.
정의
고대 한사군의 중심지인 낙랑군에서 조성되었던 무덤.
개설
널무덤
널무덤은 덧널무덤이 새로운 묘제로 채용된 이후에도 여전히 사용된 무덤인데, 비교적 계층이 낮은 인물의 장구(葬具)로 이해된다. 껴묻거리가 빈약한 경우도 있지만 세형동검 유형과 함께 활석혼입계(滑石混入系)의 취사용인 화분모양 토기(花盆形土器)와 일상용기인 두드림무늬짧은목항아리〔打捺文短頸壺〕가 세트를 이루어 부장되는 사례도 있다.
덧널무덤
홑무덤 덧널무덤에는 널무덤과 마찬가지로 세형동검으로 대표되는 청동기류와 화분모양토기, 그리고 두드림무늬짧은목항아리가 공반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그 상한은 낙랑군 설치 이전으로 소급될 가능성이 높다. 세형동검이 공반된 상리나 동대원리 허산(許山)과 이현리에서 발견된 덧널무덤이 대표적이다. 이현리 덧널무덤에서 발견된 쇠뇌의 발사장치는 곽이 없는 형식으로 시기가 빠른 것이다. 또한 전국시대(戰國時代) 후기나 진대(秦代)에 유행한 청동거울이 부장된 토성동 486호분도 낙랑군 설치 이전, 즉 위만조선 시대에 조성된 무덤이었을 개연성이 매우 높다.
병혈합장묘는 먼저 만들어진 무덤 옆에 또 하나의 무덤을 나란히 만드는 것으로 대개 선행 무덤의 무덤구덩이 일부를 침범하기도 하지만 대체로 나란히 늘어선 채로 확인되는 경우가 많다. 즉 선행 무덤과의 합장을 의식하여 추가로 조성된 무덤이다. 선행 무덤구덩이를 조성할 때에 이미 새로운 무덤구덩이가 추가될 것을 염두에 두고 색깔이 다른 흙으로 그 위치를 표시해 둔 사례도 확인된다.
낙랑에서 병혈합장묘는 출토 유물로 보아 대부분 부부합장묘로 판단된다. 남성 덧널 내부에서는 금속제 무기류의 부장이 일반적이며 여성의 덧널에서는 장신구류 등이 우세하다. 청동제 거울은 남녀 구분없이 발견된다. 여성 널의 바닥이 남성 널보다 낮게 설치되는 특징이 있으며, 피장자 측에서 보아 여성이 남성의 왼쪽에 매장되는 원칙이 충실하게 지켜진다. 합장 덧널무덤의 등장은 친족 중심의 매장습속이 부부, 즉 가족을 기본단위로 하는 매장으로 바뀌어간 증거로 이해된다.
낙랑지역의 대표적인 병혈합장묘로 정백동 37호와 53호 등을 들 수 있다. 이들 무덤에는 전 단계와 마찬가지로 세형동검이 여전히 부장되고 취사전용 토기인 화분모양토기도 동반된다. 전한경(前漢鏡)의 일종인 이체자명대경(異體字銘帶鏡)의 부장이 많은 것을 참조하면 서기전 1세기대에 유행한 묘제임을 알 수 있다.
동혈합장묘는 네모모양 내지는 장방형으로 조성된 무덤구덩이에 비교적 규모가 큰 덧널을 설치하고 그 내부에 복수의 널을 안치할 수 있도록 고안된 무덤이다. 즉 추가장(追加葬)을 의식한 것인데, 구덩식〔竪穴式〕이기 때문에 초상이 발생할 때마다 봉분과 덧널 상부를 해체해야 되는 구조적인 모순을 안고 있다. 동혈합장묘의 덧널은 홑무덤 덧널무덤이나 병혈합장 덧널무덤과는 달리 모두가 귀틀로 조립된다.
동혈합장묘는 격벽으로 부장 공간과 피장자의 공간을 엄밀하게 구분하는 경우가 많지만 격벽없이 덧널의 한쪽에 복수의 널을 안치하는 경우도 있다. 대개 부부합장을 의식하고 설계된 것이 대부분이지만 3기 이상의 널이 설치되는 경우도 있다. 이러한 경우에는 덧널의 내부구조와 껴묻거리의 위치를 크게 바꾸거나 경우에 따라서는 덧널 외부에 또 다른 공간을 만들어서 널을 추가하는 경우도 있다. 이는 병혈합장묘 단계에서는 보이지 않던 현상이다.
이 단계의 대표적인 고분은 정백동 2호, 정백동 127호 등을 들 수 있는데 석암리 205호는 덧널 바깥으로 공간을 확장하여 모두 4기의 널을 안치한 구조이다. 동혈합장묘는 부장된 칠기에서 확인되는 기년명과 청동거울의 형식으로 보아 서기 1∼2세기대에 유행한 무덤이다. 또한 출토유물의 양이 압도적이며 사치품이 많은 것으로 보아서 이 시기 최고위급의 무덤으로 보인다.
동혈합장 덧널무덤에 후행하는 낙랑의 중심 묘제가 벽돌방무덤이다. 벽돌방무덤은 외방무덤〔單室墓〕과 두방무덤〔二室墓〕이 가장 많이 발견되었지만 옆방〔側室〕이 달린 경우도 있다. 낙랑지역에서 발견된 벽돌방무덤은 지금까지의 발굴 성과로 보건데, 활처럼 둥글고 높은 천장 형태가 가장 일반적이며, 중국에서 유행한 터널식 구조를 채용한 무덤은 발견되지 않았다.
벽돌방무덤은 무덤구덩이 바닥에 벽돌을 깔고 그 위 사방벽에 벽돌을 쌓아올려 벽으로 삼는데, 낙랑에서는 3횡 1수, 즉 벽돌 3장을 눕혀쌓은 다음 1장을 세워서 쌓기를 반복하며 쌓아올리는 것이 가장 일반적으로 채택된다. 벽돌방 벽면의 기저는 대개 바깥으로 호선을 그리는 경우가 많은데, 이는 구조적으로 무덤방〔墓室〕을 견고하게 유지하려고 고안한 것이다.
또한 낙랑에서는 사례가 많지 않으나 벽돌을 깔고 벽을 쌓아서 무덤방을 만들고 목재로 지붕을 덮어서 마무리한 무덤도 있다. 북한 연구자들은 이것을 덧널무덤에서 벽돌방무덤으로 변천하는 과정에서 나타나는 과도기적인 현상으로 판단한다. 이는 덧널무덤에서 벽돌방무덤으로의 변화가 외부적인 요인에 기인하는 것이 아니라 전적으로 내부적인 발전이라는 기본인식이 전제된 해석이다. 그러나 많은 연구자들은 중국에서 이미 구조적으로 완성된 벽돌방무덤이 낙랑지역으로 수입된 것으로 판단하며, 나무뚜껑천장은 그 중의 변이이거나 중국에서의 지역색이 투영된 것으로 이해하고 있다.
벽돌방무덤
또 늦은 시기의 벽돌방무덤에는 돌천장이 채용되거나 벽면의 일부를 깬돌〔割石〕로 축조하는 경우가 있는데, 이 역시도 북한학계에서는 낙랑 벽돌방무덤이 고구려의 특징적 묘제인 돌방무덤〔石室墳〕으로 변해가는 과도기적인 현상으로 설명한다. 나아가 그러한 변화는 낙랑군이 멸망하기 전에 이미 시작되었다는 주장도 있다.
평양역구내 벽돌방무덤에서 서기 353년의 기년이 적힌 벽돌이 출토된 사실을 참고하면 낙랑지역의 벽돌방무덤은 낙랑 · 대방군이 멸망한 4세기까지 계속해서 축조된 것이 분명하다. 황해도 봉산군에서 발견된 장무이(張撫夷) 무덤도 앞에서 언급하였듯이 벽면에 석회를 바르거나 널길 좌우에 작은 딸린방〔耳室〕을 두는 등 고구려 고분의 영향이 농후하다. 이들은 모두 무덤방의 축조에 석재(石材)가 혼용되거나 천장에 판석을 얹은 것이다.
기타 무덤
의의와 평가
껴묻거리는 토기 · 동기 · 철기 · 도기(陶器) · 옥기(玉器) · 목기(木器) · 칠기(漆器) · 장신구 · 문방구 · 인(印) · 명기(明器) 등 매우 풍부하여 그 당시의 생활상과 문화수준, 그리고 금속공예수준을 가늠케 해준다. 특히 내행화문경(內行花文鏡) · 용호금수경(龍虎禽獸鏡) · 다뉴세문경(多鈕細文鏡) 등 청동거울은 정밀하고 섬세한 세공공예의 정수이며, 그 자체로서 연대구분의 표지적 유물로서 기능한다. 한편 낙랑고분에서 출토된 칠기에 적힌 명문으로 연대나 관명 · 제작자 · 제작장소 등을 알 수 있으며, 칠기에는 일반적으로 그림이나 글씨 및 금속장식 등을 하여 낙랑의 회화수준까지 엿보게 한다.
참고문헌
- 『한국고고학강의』(한국고고학회, 사회평론, 2009)
- 『평양 정백리 8·13호분』(이영훈·김길식·오영찬, 2002)
- 『낙랑』(국립중앙박물관, 솔출판사, 2001)
- 『봉산 양동리 전실묘』(국립중앙박물관, 2001)
- 「대방군의 군현지배」(오영찬,『강좌 한국고대사』10, 가락국사적개발연구원, 2003)
- 「낙랑문화 연구의 현황과 과제」(이영훈·오영찬,『낙랑』, 국립중앙박물관, 2001)
- 『樂浪塼室墓の硏究-2005∼2006年度 科學硏究費補助金(B)硏究成果報告書-』(高久健二, 埼玉大學敎養學部, 2007)
- 『樂浪古墳文化硏究』(高久健二, 學硏文化社, 1995)
- 『帶方郡及其の遺蹟』(小田省吾, 朝鮮總督府, 1935)
- 「朝鮮半島北部の塼室墓について」(田村晃一,『論苑 考古學』, 天山舍, 1993)
주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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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1
: 시체를 큰 독이나 항아리 따위의 토기에 넣어 묻는 무덤. 전 세계적으로 널리 쓰인 무덤으로, 우리나라에서는 청동기 시대부터 쓰여 지금까지도 일부 섬 지방에서 쓰이는데, 하나의 토기만을 이용하기도 하고 두 개 또는 세 개를 이용하기도 한다. 우리말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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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2
: 기와를 널 삼아 바닥에 깔고 주검을 올려놓은 다음 그 위에 기와를 덮은 무덤. 가난한 사람들의 무덤으로 알려져 있다. 우리말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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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3
: 널빤지로 된 재목. 우리말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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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4
: 흙을 둥글게 쌓아 올려서 무덤을 만듦. 또는 그 무덤. 우리말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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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5
: 한사군(漢四郡) 가운데 청천강 이남 황해도 자비령 이북 일대에 있던 행정 구역. 기원전 108년에 설치되어 그 뒤 여러 번 변천을 거듭하다가 미천왕 14년(313)에 고구려에 병합되었다. 우리말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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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6
: 장례에 쓰는 여러 가지 기구. 우리말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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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7
: 장사 지낼 때, 시체와 함께 묻는 물건을 통틀어 이르는 말. 우리말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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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8
: 나무로 만든 쐐기. 나무들의 사개를 맞물리거나 구멍을 메울 때 박는다. 우리말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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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9
: 무덤에 매장되어 있는 사람. 우리말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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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10
: 비석이나 기물에 제작이나 사용 따위의 연시(年時)를 기입한 명문(銘文). 우리말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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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11
: 하나의 널방으로만 이루어진 무덤. 우리말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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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12
: 돌방무덤의 한 봉토 안에 두 개의 방이 있는 무덤. 우리말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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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13
: 어린아이의 무덤. 우리말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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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14
: 장사 지낼 때 죽은 사람과 함께 묻는 살림살이에 쓰는 그릇. 그릇, 악기, 생활 용구 따위의 기물을 무덤에 함께 묻으려고 실물보다 작게 상징적으로 만든다. 우리말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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