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랑고분은 고대 한사군의 중심지인 낙랑군에서 조성되었던 무덤이다. 대동강 유역에서 확인되는 고분으로 널무덤[木棺墓]와 덧널무덤[木槨墓], 벽돌방무덤[塼室墓] 등이 있다. 특히 평양 근교 토성리에는 1,300여 개의 고분이 산재해 있다. 같은 시기 한반도에 존재했던 국가들의 묘제와는 현저히 다른 특징을 보이며 중국 한나라 문화를 대변하는 고분이다. 토기·동기·철기·도기(陶器)·옥기(玉器)·목기(木器)·칠기(漆器)·장신구·문방구·인(印)·명기(明器) 등 다양한 껴묻거리가 발굴되었다.
대동강이 흐르는 평양지역을 중심으로 황해도와 평안남도에 걸쳐서 확인되는 한대(漢代), 혹은 서진대(西晉代) 병행기에 조성된 무덤으로서 중국식, 혹은 그 영향을 강하게 받은 것과 재지 전통이 강한 묘제로 구성된다. 평양 근교 토성리(土城里)에는 남북 10여 리, 동서 수십 리에 이르는 넓은 지역에 1,300여 개의 낙랑고분이 산재해 있고, 황해도에도 무수히 분포되어 있다. 낙랑고분으로는 널무덤과 덧널무덤, 그리고 벽돌방무덤이 가장 일반적이지만 독널무덤[甕棺墓]과 기와널무덤[瓦棺墓], 그리고 소형 벽돌덧널무덤[塼槨墓]도 일부 포함된다.
낙랑지역에서 확인되는 널무덤은 무덤구덩이〔墓壙〕에 판재(板材)를 조립하거나 통나무를 2분할하여 내부를 파낸 널〔木棺〕을 안치하고 무덤구덩이와 널 사이 혹은 나무널의 머리맡과 발치에 부장품(副葬品)을 두는 경우가 많다. 물론 봉분을 조성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널무덤은 낙랑과 관련된 묘제 중에서는 등장 시기가 가장 빠른 형식으로 이해되는데, 세형동검 유형의 청동기를 부장하던 전단계의 재지계 움무덤〔土壙墓〕과 분명한 계승관계가 인정된다.
널무덤은 덧널무덤이 새로운 묘제로 채용된 이후에도 여전히 사용된 무덤인데, 비교적 계층이 낮은 인물의 장구(葬具)로 이해된다. 껴묻거리가 빈약한 경우도 있지만 세형동검 유형과 함께 활석혼입계(滑石混入系)의 취사용인 화분모양 토기(花盆形土器)와 일상용기인 두드림무늬짧은목항아리〔打捺文短頸壺〕가 세트를 이루어 부장되는 사례도 있다.
널무덤에 이어서 출현하는 덧널무덤은 크게 홑무덤〔單葬〕덧널무덤과 합장(合葬)류 덧널무덤으로 구분되는데 후자는 다시 병혈합장(竝穴合葬)과 동혈합장(同穴合葬)으로 분류된다. 홑무덤 덧널무덤은 글자 그대로 홀로묻기 전용으로 조성된 덧널무덤을 일컫는다. 이는 판재식 덧널무덤과 귀틀 덧널무덤으로 나누어지는데, 전자는 무덤구덩이를 조성한 다음 나무 판재를 여러 장 잇대어 덧널을 만든 것이고, 후자는 각재를 쌓아 올려서 무덤구덩이 내에 부장공간을 만든 것이다. 판재를 잇기 위해서 나무쐐기가 사용된다는 점이 중요한 특징인데, 이는 재지사회의 장구 제작법과는 뚜렷하게 다른 방법이다. 널과 덧널 사이의 공간, 즉 두부(頭部) 쪽 공간과 측면 공간이 모두 껴묻거리를 두는 공간으로 활용되며, 널 내부에는 착장형 유물만이 부장된다.
홑무덤 덧널무덤에는 널무덤과 마찬가지로 세형동검으로 대표되는 청동기류와 화분모양토기, 그리고 두드림무늬짧은목항아리가 공반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그 상한은 낙랑군 설치 이전으로 소급될 가능성이 높다. 세형동검이 공반된 상리나 동대원리 허산(許山)과 이현리에서 발견된 덧널무덤이 대표적이다. 이현리 덧널무덤에서 발견된 쇠뇌의 발사장치는 곽이 없는 형식으로 시기가 빠른 것이다. 또한 전국시대(戰國時代) 후기나 진대(秦代)에 유행한 청동거울이 부장된 토성동 486호분도 낙랑군 설치 이전, 즉 위만조선 시대에 조성된 무덤이었을 개연성이 매우 높다.
병혈합장묘는 먼저 만들어진 무덤 옆에 또 하나의 무덤을 나란히 만드는 것으로 대개 선행 무덤의 무덤구덩이 일부를 침범하기도 하지만 대체로 나란히 늘어선 채로 확인되는 경우가 많다. 즉 선행 무덤과의 합장을 의식하여 추가로 조성된 무덤이다. 선행 무덤구덩이를 조성할 때에 이미 새로운 무덤구덩이가 추가될 것을 염두에 두고 색깔이 다른 흙으로 그 위치를 표시해 둔 사례도 확인된다.
낙랑에서 병혈합장묘는 출토 유물로 보아 대부분 부부합장묘로 판단된다. 남성 덧널 내부에서는 금속제 무기류의 부장이 일반적이며 여성의 덧널에서는 장신구류 등이 우세하다. 청동제 거울은 남녀 구분없이 발견된다. 여성 널의 바닥이 남성 널보다 낮게 설치되는 특징이 있으며, 피장자 측에서 보아 여성이 남성의 왼쪽에 매장되는 원칙이 충실하게 지켜진다. 합장 덧널무덤의 등장은 친족 중심의 매장습속이 부부, 즉 가족을 기본단위로 하는 매장으로 바뀌어간 증거로 이해된다.
낙랑지역의 대표적인 병혈합장묘로 정백동 37호와 53호 등을 들 수 있다. 이들 무덤에는 전 단계와 마찬가지로 세형동검이 여전히 부장되고 취사전용 토기인 화분모양토기도 동반된다. 전한경(前漢鏡)의 일종인 이체자명대경(異體字銘帶鏡)의 부장이 많은 것을 참조하면 서기전 1세기대에 유행한 묘제임을 알 수 있다.
동혈합장묘는 네모모양 내지는 장방형으로 조성된 무덤구덩이에 비교적 규모가 큰 덧널을 설치하고 그 내부에 복수의 널을 안치할 수 있도록 고안된 무덤이다. 즉 추가장(追加葬)을 의식한 것인데, 구덩식〔竪穴式〕이기 때문에 초상이 발생할 때마다 봉분과 덧널 상부를 해체해야 되는 구조적인 모순을 안고 있다. 동혈합장묘의 덧널은 홑무덤 덧널무덤이나 병혈합장 덧널무덤과는 달리 모두가 귀틀로 조립된다.
동혈합장묘는 격벽으로 부장 공간과 피장자의 공간을 엄밀하게 구분하는 경우가 많지만 격벽없이 덧널의 한쪽에 복수의 널을 안치하는 경우도 있다. 대개 부부합장을 의식하고 설계된 것이 대부분이지만 3기 이상의 널이 설치되는 경우도 있다. 이러한 경우에는 덧널의 내부구조와 껴묻거리의 위치를 크게 바꾸거나 경우에 따라서는 덧널 외부에 또 다른 공간을 만들어서 널을 추가하는 경우도 있다. 이는 병혈합장묘 단계에서는 보이지 않던 현상이다.
이 단계의 대표적인 고분은 정백동 2호, 정백동 127호 등을 들 수 있는데 석암리 205호는 덧널 바깥으로 공간을 확장하여 모두 4기의 널을 안치한 구조이다. 동혈합장묘는 부장된 칠기에서 확인되는 기년명과 청동거울의 형식으로 보아 서기 1∼2세기대에 유행한 무덤이다. 또한 출토유물의 양이 압도적이며 사치품이 많은 것으로 보아서 이 시기 최고위급의 무덤으로 보인다.
동혈합장 덧널무덤에 후행하는 낙랑의 중심 묘제가 벽돌방무덤이다. 벽돌방무덤은 외방무덤〔單室墓〕과 두방무덤〔二室墓〕이 가장 많이 발견되었지만 옆방〔側室〕이 달린 경우도 있다. 낙랑지역에서 발견된 벽돌방무덤은 지금까지의 발굴 성과로 보건데, 활처럼 둥글고 높은 천장 형태가 가장 일반적이며, 중국에서 유행한 터널식 구조를 채용한 무덤은 발견되지 않았다.
벽돌방무덤은 무덤구덩이 바닥에 벽돌을 깔고 그 위 사방벽에 벽돌을 쌓아올려 벽으로 삼는데, 낙랑에서는 3횡 1수, 즉 벽돌 3장을 눕혀쌓은 다음 1장을 세워서 쌓기를 반복하며 쌓아올리는 것이 가장 일반적으로 채택된다. 벽돌방 벽면의 기저는 대개 바깥으로 호선을 그리는 경우가 많은데, 이는 구조적으로 무덤방〔墓室〕을 견고하게 유지하려고 고안한 것이다.
또한 낙랑에서는 사례가 많지 않으나 벽돌을 깔고 벽을 쌓아서 무덤방을 만들고 목재로 지붕을 덮어서 마무리한 무덤도 있다. 북한 연구자들은 이것을 덧널무덤에서 벽돌방무덤으로 변천하는 과정에서 나타나는 과도기적인 현상으로 판단한다. 이는 덧널무덤에서 벽돌방무덤으로의 변화가 외부적인 요인에 기인하는 것이 아니라 전적으로 내부적인 발전이라는 기본인식이 전제된 해석이다. 그러나 많은 연구자들은 중국에서 이미 구조적으로 완성된 벽돌방무덤이 낙랑지역으로 수입된 것으로 판단하며, 나무뚜껑천장은 그 중의 변이이거나 중국에서의 지역색이 투영된 것으로 이해하고 있다.
낙랑의 벽돌방무덤은 요동지역이나 산동성의 벽돌방무덤과 유사성이 높은 것으로 설명되기도 한다. 애초 낙랑 벽돌방무덤은 2세기 말에 출현하여 3세기대에 가장 유행한 것으로 이해되었다. 그러나 최근에는 문양전(文樣塼)이 병용된 덧널무덤의 시기가 1세기인 것이 있어 이를 근거로 낙랑에서 벽돌방무덤의 상한연대를 서기 1세기대로 소급시켜야 된다는 주장도 있다. 물론 발굴조사를 통해서 1세기대의 벽돌방무덤이 확인된 것은 아니다.
또 늦은 시기의 벽돌방무덤에는 돌천장이 채용되거나 벽면의 일부를 깬돌〔割石〕로 축조하는 경우가 있는데, 이 역시도 북한학계에서는 낙랑 벽돌방무덤이 고구려의 특징적 묘제인 돌방무덤〔石室墳〕으로 변해가는 과도기적인 현상으로 설명한다. 나아가 그러한 변화는 낙랑군이 멸망하기 전에 이미 시작되었다는 주장도 있다.
평양역구내 벽돌방무덤에서 서기 353년의 기년이 적힌 벽돌이 출토된 사실을 참고하면 낙랑지역의 벽돌방무덤은 낙랑 · 대방군이 멸망한 4세기까지 계속해서 축조된 것이 분명하다. 황해도 봉산군에서 발견된 장무이(張撫夷) 무덤도 앞에서 언급하였듯이 벽면에 석회를 바르거나 널길 좌우에 작은 딸린방〔耳室〕을 두는 등 고구려 고분의 영향이 농후하다. 이들은 모두 무덤방의 축조에 석재(石材)가 혼용되거나 천장에 판석을 얹은 것이다.
한편 낙랑 · 대방 시기의 독무덤은 대부분 이음식〔合口式〕으로 화분모양토기와 대형 두드림무늬짧은목항아리가 선호되는 경향이 있다. 남경 독무덤처럼 독무덤 만으로 구성된 분묘군이 있는가 하면 덧널무덤이나 벽돌방무덤에 딸리거나 유아묘(幼兒墓)로 사용되는경우도 있다. 소수의 사례가 보고된 기와널무덤과 벽돌덧널무덤도 대개 유아묘로 판단되는데, 만약 성인묘라고 할 지라도 부장된 유물이 없는 것이 대부분이어서 하위 계층의 묘제로 보인다.
낙랑고분의 주요 묘제는 덧널무덤과 벽돌방무덤으로서 같은 시기 한반도에 존재했던 국가들의 묘제와는 현저히 다른 특징을 보인다. 덧널무덤과 벽돌방무덤의 축조방법에서 당시 낙랑 건축기술의 높은 수준을 이해할 수 있으며 이들 묘제는 중국한나라 문화를 대변하는 것이다. 특히 벽돌방무덤의 “활모양으로 둥글게 휜 천장”은 구조적으로 무게의 분산을 꾀하였고, 사용 위치에 따라 벽돌의 형태를 달리하여 튼튼하고 아름답게 쌓아 서구의 벽돌 건축물에 비견될 만하다.
껴묻거리는 토기 · 동기 · 철기 · 도기(陶器) · 옥기(玉器) · 목기(木器) · 칠기(漆器) · 장신구 · 문방구 · 인(印) · 명기(明器) 등 매우 풍부하여 그 당시의 생활상과 문화수준, 그리고 금속공예수준을 가늠케 해준다. 특히 내행화문경(內行花文鏡) · 용호금수경(龍虎禽獸鏡) · 다뉴세문경(多鈕細文鏡) 등 청동거울은 정밀하고 섬세한 세공공예의 정수이며, 그 자체로서 연대구분의 표지적 유물로서 기능한다. 한편 낙랑고분에서 출토된 칠기에 적힌 명문으로 연대나 관명 · 제작자 · 제작장소 등을 알 수 있으며, 칠기에는 일반적으로 그림이나 글씨 및 금속장식 등을 하여 낙랑의 회화수준까지 엿보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