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용 요약
봉니는 고대 낙랑군에서 공문서를 봉함하기 위하여 묶은 노끈의 이음매에 붙이는 인장을 눌러 찍은 점토덩어리이다. 원래 고대 오리엔트 지역에서 기원하였는데 중국 전국시대에 전래된 것으로 추정된다. 내용을 변조하기 쉬운 죽간과 목간을 밀봉하거나 중요한 물품의 보관과 내용물 도난을 막기 위해 이용되었다. 인장을 문서에 날인할 수 있는 종이가 개발되면서 사용하지 않았다. 일제강점기에 평양시 남안에서 200여 점이 발견되어 낙랑군이 평양 일대에 존재했다는 고고학적 증거로 활용되었다. 해방 이후 재발굴 결과, ‘낙랑군 평양설’을 주장하기 위하여 날조한 위조품으로 판명되었다.
정의
고대 낙랑군에서 공문서를 봉함하기 위하여 묶은 노끈의 이음매에 붙이는 인장을 눌러 찍은 점토덩어리.
개설
연원
죽간과 목간은 표면을 깎아내는 것으로 비교적 간단하게 내용을 바꿀 수 있었기에 봉함은 필수적인 조건이었다. 중요한 물품의 보관과 내용물 도난을 막기 위한 용도로도 봉니는 요긴하게 이용되었다. 후한(後漢)대에 종이가 개발되고 위진남북조시대(魏晋南北朝時代)를 거치면서 보급이 확대되자 봉니의 사용은 급격히 줄어든다. 그것은 공문서의 형태가 간책에서 종이로 바뀌었기 때문이며, 종이에는 인장을 문서에 직접 날인할 수 있었기 때문으로 이해된다. 인장 역시 보조를 맞추어 봉니용의 음각체에서 종이용의 양각체로 바뀌었다.
내용
그러나 이미 정인보(鄭寅普) 등은 이들을 위조품으로 보았으며 해방 후 북한학계에서도 토성리토성에 대한 재발굴 결과를 바탕으로 이들 모두가 ‘낙랑군 평양설’을 주장하기 위하여 날조한 위조품이라고 강하게 비판하였다. 이때 보고된 봉니에는 위조된 것이 많은 것이 사실이다. 특히 채집된 자료 중에는 구워진 봉니가 존재하기도 하는데, 간책이나 용기를 봉한 다음에 점토를 붙이기 때문에 이것을 구울 수는 없는 일이다. 또한 중국에서조차 군현의 속현에 해당하는 관인 대부분이 확인된 사례는 없다. 일제강점기 당시 낙랑과 관련된 많은 위조품이 제작되어 유통되던 시대상을 고려하면 그 시기에 보고된 봉니에 위조품이 포함되어 있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러나 1930년대에 동경대학이 실시한 토성리토성의 발굴조사에서 여러 점의 봉니가 실제로 출토되었기 때문에 낙랑지역에서 발견된 봉니 모두를 위조했다고 판단할 수는 없다. 토성리토성에서 채집되었다고 알려지는 봉니는 현재 국립중앙박물관과 일본의 동경박물관, 그리고 동경대학교 문학부에 각기 소장되어 있다. 한편, 근래 중국 요령성 금서시에서 “임둔태수장(臨屯太守章)”이 압인된 봉니가 발견되어 이 곳을 임둔군(臨屯郡)으로 보는 주장이 제기되기도 하였다.
참고문헌
- 『낙랑 문화 연구』(정인성 외, 동북아역사재단, 2006)
- 「임둔태수장 봉니를 통해 본 한사군의 위치」(복기대,『백산학보』61, 2001)
- 「낙랑시대의 명문고-와전·봉니·인장을 중심으로-」(김종태,『고고미술』135, 1977)
- 『中國の封泥』(國立東京博物館, 二玄社, 2002)
- 『樂浪』(駒井和愛, 中公新書, 1972)
- 『帶方郡及其の遺蹟』(小田省吾, 朝鮮總督府, 1935)
- 「樂浪封泥攷」(藤田亮策,『小田先生頌壽記念朝鮮論集』, 1934)
주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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