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분모양 토기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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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가리가 곡선이나 직각으로 꺾여 벌어지고, 몸통은 약간의 직선을 이루면서 바닥쪽으로 좁아지며, 바닥이 납작하거나 굽이 붙은 화분 모양의 토기.
이칭
이칭
화분형토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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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아가리가 곡선이나 직각으로 꺾여 벌어지고, 몸통은 약간의 직선을 이루면서 바닥쪽으로 좁아지며, 바닥이 납작하거나 굽이 붙은 화분 모양의 토기.
내용

이전에는 청동기시대 민무늬토기인 가락동형(可樂洞型) 토기, 역삼동형(驛三洞型) 토기가 화분모양 토기로 불렸다. 이것은 몸통이 가장 넓고 아가리가 약간 오므라든 팽이모양 토기처럼 생긴 바리모양〔鉢形〕토기와 구별하려는 용어로 사용되었다. 즉, 화분모양 토기는 아가리쪽이 가장 넓고, 점차 아래쪽으로 좁아들면서 바닥과 연결되는 특징을 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낙랑 고분에서 전형적인 화분모양 토기가 출토되어 민무늬토기시대의 것과 혼란이 일어나자, 민무늬토기시대의 화분모양 토기를 바리모양 토기, 또는 독모양〔甕形〕토기로 불렀다. 현재 고고학계와 역사학계에서 화분모양 토기는 시간·공간적 제약성을 가진 용어로 사용되고 있다. 화분모양 토기가 낙랑군 설치를 전후하여 낙랑 지역의 낙랑 고분에 출토되었으므로, 낙랑 토기의 한 형태로 파악한다.

화분모양 토기는 바탕흙〔胎土〕에 활석(滑石)이 혼입되었고 형뜨기로 제작되었으며 사용 흔적이 확인되므로, 음식을 삶고 끓이는 자비용(煮沸用)으로 사용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활석이 혼입된 낙랑 토기는 깊은바리모양〔深鉢形〕토기, 얕은바리모양〔淺鉢形〕토기, 솥모양〔鼎形〕토기, 큰 항아리〔大壺〕, 큰 독 등이 있지만, 활석이 혼입된 토기 가운데 무덤의 껴묻거리로 사용된 것은 화분모양 토기뿐이다.

화분모양 토기의 제작 방법은 기존에 덩이흙〔粘土塊〕을 외형에 넣고서 내형을 밀어 성형한 것으로 이해하였지만, 최근에는 형틀 바깥에 점토를 덧붙이고 민무늬 두드림을 가해 성형하고서 형틀을 분리한 뒤 회전받침에 고정시켜 아가리 부분을 만든 것으로 이해한다.

화분모양 토기는 아가리와 바닥 모양에 따라 몇 가지 형식으로 나눈다. 전형적인 모습의 화분모양 토기는 직립한 몸통에 아가리 부분이 바깥쪽으로 거의 직각으로 꺾여 아가리끝 부분이 두터운 단면 사각형을 이루면서 바닥이 평평한 모습이다. 변형 화분모양 토기는 아가리가 바깥쪽으로 곡선을 이루며 꺾였고, 아가리 끝부분이 몸통 부분 기벽(器壁)의 두께와 거의 비슷하며, 바닥에 들린 밑굽이 달린 모습이다. 이 두 가지 토기는 시간 흐름에 따라 점차 다른 모습을 갖추었을 것으로 보인다.

화분모양 토기는 독널무덤〔甕棺墓〕, 움무덤〔土壙墓〕, 덧널무덤〔木槨墓〕, 귀틀무덤, 벽돌무덤〔塼築墳〕등에서 출토되었다. 전형 화분모양 토기는 둥근 바닥에 두드림 무늬가 있는 배부른 단지 모양의 목짧은 항아리〔短頸壺〕와 함께 홑무덤〔單葬〕식 덧널무덤에 껴묻거리로 놓인 경우가 많았다. 평양 낙랑구역 정백동 3호·127호, 정오동 7호 등에서 주로 출토되었다.

전형 화분모양 토기의 기원에 대해서는 여러 견해가 제시되었다. 대체로 토기의 모습이 재지의 깊은바리모양 토기(명사리형 토기)와 관련되었고, 바탕흙에 활석을 첨가한 방식은 팽이모양 토기 및 가는 모래를 섞어 구운 전국(戰國)계 협사홍도(夾砂紅陶)와 관련되었다고 보았다. 하지만 화분모양 토기를 전국계 두드림무늬〔打捺文〕토기의 영향으로 변질된 민무늬 토기로 보아, 한반도 남부의 경질 민무늬토기(중도식 토기, 中島式土器)와 비슷한 것으로 파악하거나 연화보-세죽리(蓮花保-細竹里) 유형에서 기원을 찾기도 하였다. 한편, 바탕흙의 활석 혼입, 기형(器形), 제작 방식으로 보아 민무늬 토기와 직접적인 관련성을 말하기 어렵고, 서북 지방에서 민무늬 토기와 화분모양 토기 사이에 덧띠토기문화 단계에 해당하는 명사리형(明沙里型) 토기가 끼여 있는데, 덧띠토기문화가 전국시대 연나라의 토기문화와 접촉하여 성립하였다는 견해도 있다. 이렇듯 화분모양 토기의 기원에 대해서는 아직 정설이 없는 상황이다.

다만 기원과 관련해서 외부 요소가 재지 토기문화에 언제 개입하였는가에 따라 두 가지 상한(上限)설이 제시되었다. 즉, 덧널무덤에서 출토된 것을 통해 낙랑군 설치 이후인 서기전 2세기 후반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기도 하고, 전국시대 연나라 계통의 토기문화와 관련시킨 견해처럼 서기전 2세기 중엽경으로 보기도 한다.

변형 화분모양 토기는 주로 귀틀무덤이나 벽돌방무덤〔塼室墳〕에서 출토되었는데, 평평한 바닥을 가진 목짧은 항아리와 목 긴 항아리〔長頸壺〕가 함께 확인되었다. 대표 유적은 평양 정오동 5호· 9호분, 석암리 205호, 정백동 3호묘 등이다. 이 토기의 출현 시점은 최근에 정백동 3호묘에서 이체자명 대경(異體字銘帶鏡)과 성운문경(星雲文鏡)이 함께 나온 것을 근거로 서기전 1세기까지 소급될 가능성이 제기되었다. 벽돌방무덤인 정백동 46호·69호, 석암리 99호 등에서도 출토되었으므로, 그 하한은 대체로 3세기 후반까지일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참고문헌

『낙랑』(국립중앙박물관, 2001)
「낙랑토성의 ‘활석혼입계토기’와 그 연대」(정인성,『백제연구』40, 2004)
「낙랑토성의 토기」(정인성,『한국고대사연구』34, 2004)
「소위 화분형토기에 관하여」(김양옥,『아세아고문화』, 황용혼박사정년퇴임기념논총, 1995)
「한강유역의 무문토기시대」(임병태,『이홍직박사 회갑기념 한국사논총』, 1969)
「한국무문토기 지역분류 시론」(김원용,『고고학』1, 1968)
집필자
천선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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