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조예군묘(夫租薉君墓)는 평양직할시 낙랑구역 정백동에 있는 예맥족 군장 부조예군의 덧널무덤이다. 발견 당시 봉분과 무덤 내부가 거의 파괴되어 있었으나, 남아 있는 흔적으로 보아 단장 덧널무덤으로 추정된다. 발굴 결과 세형동검을 비롯한 다양한 유물이 함께 발견되었는데 이 중에는 부조예군을 새긴 은제 도장이 출토되어 피장자의 정체를 파악할 수 있다. 세형동검 문화의 전통을 유지한 덧널무덤이라는 점에서 서기전 1세기 대 낙랑군의 치하에 있던 고조선 후기 토착 세력의 모습을 보여 주는 무덤으로 주목된다.
부조예군묘는 평양직할시 낙랑구역 정백동에서 발굴 조사된 정백동 1호무덤을 말한다. 일제강점기에 조사된 대동강면 1호무덤, 혹은 정백동 1호무덤과는 전혀 다른 고분으로 광복 직후인 1958년 11월에 지역민이 땅을 파다가 발견하여 발굴 조사한 고분이다.
발굴 결과 세형동검(細形銅劍)을 비롯하여 다양한 유물들이 함께 발굴되었는데, 이 중에는 부조예군(夫組穢君)을 새긴 은제 도장이 출토되어 이 묘를 부조예군묘라고 부르게 되었다.
발굴 당시 봉분은 깎여 편평하게 없어진 상태였다. 무덤 내부도 거의 파괴되어 바닥에서 나무널 1기를 올려놓을 정도의 범위에서 나무 각재가 한 벌 깔려 있었을 뿐이었다. 덧널의 흔적도 발견되지 않았으며 피장자를 안치한 나무널의 흔적도 남아 있지 않았다. 그렇지만 남아 있는 흔적 등으로 보아 수직으로 장방형의 무덤구덩이에 파서 만들고 내부에 덧널을 설치한 다음 그 속에 다시 나무널을 수납한 단장 덧널무덤으로 추정되었다.
무덤은 주축이 남북에서 동남쪽으로 약간 치우친 형태이다. 부장품의 배치로 보아 머리 방향을 남쪽으로 둔 형태였다. 북쪽, 즉 피장자의 발이 있는 쪽에 해당하는 공간에는 화분형토기와 납작바닥짧은목항아리가 놓였고, 그 주위에는 삿갓모양동기, 멍에끝장식 등 거마구(車馬具) 등이 부장되었다. 부장 칸의 동북 모서리에는 쇠도끼와 쇠갑옷 조각 등이 놓여 있었다.
그리고 피장자가 놓였던 나무널 바닥 중앙부의 좌측에는 세형동검과 그 부속구, 그리고 세형동모(細形銅矛)와 쇠뇌 등이 놓여 있었다. 피장자의 우측에는 철단검과 쇠칼 등이 부장된 상태였다. 문제의 부조예군 도장은 바닥의 한가운데에서 출토되었다. 세형동검과 철제 무기를 몸에 단 상태로 묻힌 남성임을 알 수 있다. 피장자의 정체가 새겨진 도장도 허리춤에 차고 부장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세형동검은 청동 금구로 화려하게 장식된 칼집에 삽입된 상태로 출토되었다. 이러한 칼집은 창원다호리고분군 1호분 등에서도 출토되었으며 최근에는 경산양지리유적 등지에서도 출토되었다. 칼몸은 전형적인 세형동검으로 등날이 슴베 부분까지 내려오는 형태이다. 크기는 길이 39.6㎝, 날 너비 48㎝, 등대 두께 1.6㎝이다.
쇠단검은 완형(完形)과 부러진 것 각 1점이 나왔다. 이 중 완형은 길이 34㎝, 슴베 길이 10㎝, 칼몸 폭 4.5㎝이며, 형태상으로 비록 등대와 이지러진 부분은 없지만, 전체적인 형태는 함께 출토된 세형동검과 유사하다. 부러진 1점은 세형동검과 유사한 칼집 속에 들어 있었으며, 검코도 출토되었다. 이러한 쇠단검과 칼집은 대안태성리고분군 8호분에서도 출토되었다. 구리화살촉은 날개촉 6점, 세모촉 9점이 출토되었다.
출토 유물 중에서는 마구류도 많다. 우선 말머리꾸미개는 마름모꼴로 별다른 문양 없이 은장식만 하였다. 재갈은 철제이며 재갈멈치는 S형, 즉 프로펠라형이다. 고삐고리, 삿갓모양동기 등도 출토되었는데 모두 수레 부속구로 판단된다. 이러한 수레 부속구는 중원 세계에서 출토되는 것들과 형태가 다른 것으로 흉노(匈奴) 등 유목민들의 그것과도 다른 형태이다.
피장자의 정체를 알려 주는 도장은 은제이며, 한 변이 2.2㎝인 네모진 형태이다. 도장의 상부에는 짐승 모양의 손잡이가 부착되었고, 4등분된 도장면에 소전(小篆) 글씨체로 ‘부조예군’을 새겼다.
부조예군은 부조현(夫租縣) 지역의 유력한 세력 수장이 한사군(漢四郡)이 설치되면서 기존의 세력을 인정받아 군현으로부터 읍군(邑君)으로 임명되어 부조예군 인수를 받은 인물로 추정된다. 낙랑군이 의도적으로 평양으로 거처를 옮겨 살게 했다가, 죽은 후에 평양에 묻혔다는 견해가 있다.
부조예군은 한사군의 설치와 관련되어 봉군된 부조 출신 예맥족 군장으로 추정된다. 무덤 양식도 전통적인 널무덤에 전한의 덧널무덤이 영향을 미치고 있음을 알 수 있으며 외래계 수레 부속과 토착적인 세형동검이 동반된다. 이는 피장자가 한나라와 연관된 토착 지배층일 가능성을 보여 준다.
부조는 『한서(漢書)』 「지리지」에 낙랑군 현의 하나로 나오며, 『삼국지(三國志)』 「동이전」에는 옥저로 나오는데, 위만조선의 지배를 받고 있다가 임둔군의 속현이 된 것으로 여겨진다.
공인(公印)은 개인의 소유가 아닌 만큼 한나라 대에는 모조품을 만들어 부장해 피장자의 지위를 나타내기도 하였다. 이는 부조장인(夫租長印)을 부장하고 있는, 같은 정백동에 위치한 고상현묘(高常賢墓)에서 확인된다. 그런데 부조예군 도장은 실인으로 무덤에 부장되어 있다. 이것은 토착 세력과 단절된 부조예군의 지위가 허구화되어 그의 죽음과 더불어 도장을 회수할 가치나 필요성이 없어지면서 가능했던 것으로 추정해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