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산 양동리 고분군 ( )

선사문화
유적
북한 황해북도 봉산군에 있는 낙랑군의 무덤군.
이칭
이칭
봉산양동리전실묘
유적/고인돌·고분·능묘
양식
무덤군
건립 시기
초기국가시대
관련 국가
한나라
소재지
황해북도 봉산군
• 본 항목의 내용은 해당 분야 전문가의 추천을 통해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내용 요약

봉산양동리고분군(鳳山養洞里古墳群)은 북한 황해북도 봉산군에 있는 낙랑군의 무덤군이다. 1917년과 1922년에 발굴 조사가 실시되었으나 전모가 알려진 것은 양동리 3 · 5호분이다. 양동리 3 · 5호분은 방대형 분구와 궁륭형 천장의 전형적인 낙랑계 벽돌무덤이다. 출토된 각종 유물의 성격으로 보아 피장자는 군현에서 활동한 인물로 추정된다. 무덤의 구조나 토기의 양상으로 보아 양동리 3 · 5호분의 추정 연대는 3세기 전반으로 볼 수 있으며, 이 지역에 축조된 벽돌무덤의 연대를 가늠할 수 있는 기준을 제공한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정의
북한 황해북도 봉산군에 있는 낙랑군의 무덤군.
발굴경위 및 결과

봉산양동리고분군은 벽돌무덤이 많은 것으로 알려져 낙랑군과 대방군 시기에 조영된 고분군으로 인식된다. 일제강점기인 1916년도 제1차 조선고적조사 과정에서 일부 고분의 도굴 사실이 알려졌고, 이듬해인 1917년도에 그 중 2기의 고분에 대한 발굴 조사가 이루어졌다.

1922년에도 한 차례 발굴 조사가 있었지만, 오랫동안 보고서가 공개적으로 간행되지 않아 그 전모를 알 수가 없었다. 조사 내용은 2001년에 국립중앙박물관이 『봉산양동리전실묘』라는 보고서를 작성하면서 드디어 알려지게 되었다.

당시 발굴 조사는 야쓰이 세이이쓰〔谷井濟一〕가 맡았는데 노모리 겐〔野守健〕과 오가와 게이키치〔小川敬吉〕 등이 참여하여 1917년 5월 7일에 시작되었다. 보고서가 공개적으로 간행되어 전모가 알려진 것은 양동리 3호와 5호로 제한된다.

형태와 특징

양동리 3호분의 분구는 평면이 방대형이고 단면은 사다리꼴이다. 규모는 동서 길이가 25.24m이고 남북으로 잔존 길이가 26.6m에 달하며 높이는 무덤구덩이 바닥부터 5.91m였다. 비교적 대형 고분이라고 할 수 있다.

조사 당시 뒷방의 상부에 큰 도굴 구덩이가 있었다. 분구 조사는 실시되지 않았지만 복명서(復命書)에는 허드레 돌덩이가 거의 포함되어 있지 않은 흙을 단단하게 다져 놓았다고 표현하였다. 무덤구덩이는 도면이나 사진상으로는 확인되지 않지만, 당시의 사진과 도면을 살피건대 일정 깊이의 굴광(堀壙)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매장 주체부는 벽돌을 쌓아 올려서 만들었는데, 앞방과 뒷방으로 구성된 2실묘이다. 게다가 뒷방에는 작은 곁방이 딸려 있다. 앞방에는 널길이 설치되었는데 아치형 구조의 무덤 앞으로 들어가는 문과 납작천창 구조의 널길 부분으로 이루어진다.

널길 입구가 무덤 앞으로 들어가는 문보다 약간 넓고, 양 측벽은 밖으로 살짝 배가 부른 호벽(弧壁) 구조인데 위로 올라가면서 약간 내경(內頃)한다. 벽면은 최하단부에서 뉘어쌓기하여 3단, 세워쌓기로 1단을 쌓는 ‘3횡 1수’를 되풀이하면서 쌓았다. 무늬벽돌과 민무늬벽돌이 섞여 있는 부분이 많다. 벽돌과 벽돌 사이에는 회반죽을 발라서 쌓아 올렸다.

뒷방은 피장자가 안치되었던 널방으로, 앞방에 비해 약간 서쪽으로 치우쳐 있다. 4벽이 호벽 즉 바깥으로 배부른 형태이다. 크기는 동서 길이가 359〜407.9㎝, 남북 길이가 327.3〜336.4㎝다. 뒷방 남벽의 가운데에는 앞방과 통하는 널문이 있다. 이 널문은 벽면을 쌓는 데 사용한 벽돌과 똑같은 벽돌로 막았다.

뒷방 동벽의 북동쪽 모서리와 북벽 중앙부는 도굴로 크게 파괴되었다. 천장부는 모두 함몰되어 구조를 알 수 없지만, 남아 있는 곁방의 천장 구조와 벽면의 곡선으로 추정하건대 궁륭형(穹窿形) 구조였을 것으로 보인다.

뒷방에는 모두 2개의 나무널이 안치되었는데 하나는 관대(棺臺) 위에, 다른 하나는 뒷방 서반부의 바닥에 별다른 시설이 없는 곳에 안치되어 있었다. 나무널은 길이가 254.5㎝를 계측하는데 남쪽 폭이 더 넓은 것을 보면 피장자의 머리 방향은 남쪽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서반부의 나무널도 남북 방향으로 놓였는데, 이 역시 머리 방향은 남쪽이다. 나무널이 놓였던 자리에서는 쇠못이 10여 개 발견되었다. 나무널 조립은 기본적으로 나무못으로 고정시켰으나 보조적으로 쇠못이 이용된 것이다.

곁방은 뒷방의 서쪽에 딸려 있는데, 입구의 천장부가 함몰되었지만 대체로 보존 상태가 양호하다. 크기가 작을 뿐 축조 방법은 앞방, 뒷방과 똑같은 형태이다. 물론 바깥으로 배부른 형태도 똑같다.

양동리 3호분의 축조에 사용된 벽돌은 무늬벽돌이 많다. 이중마름모무늬, 삼중마름모무늬, 마름모무늬의 중심에 주문(珠紋)이 있는 것이 대부분이다.

출토 유물은 토기류와 칠기, 화폐와 청동 차마구 등이 있다. 먼저 토기류는 납작바닥짧은목항아리와 짧은목항아리가 있다. 모두 니질계 토기로 전형적인 낙랑 토기의 제작 기법과 형태적 특징을 띤다. 칠기렴은 수입품으로 보이며 금동제의 동물형 수환(獸環)도 수입된 고급 칠기에서 떨어져 나온 것으로 추정된다. 화폐는 화천(貨泉)과 대천오십(大泉五十), 오수전(五銖錢)이 출토되었다. 청동제의 차축두(車軸頭)는 소형으로 실용품이 아닌 명기로 제작된 물품으로 보인다. 이외에 철제의 고리자루칼이 출토되었다.

양동리 5호분은 3호분과 마찬가지로 널길과 앞방, 뒷방으로 구성된 벽돌무덤이다. 게다가 앞방의 서쪽에는 작은 곁방이 딸린 구조이다. 분구는 동서 32m, 남북 35.5m로 대형이다. 비교적 경사가 가파른 분구의 북쪽 사면에 널길이 확인된다. 매장 주체부는 지표 아래에 굴광을 파고 설치된 반지하식 구조이다.

널길은 평면이 장방형이고 동서 양쪽 벽이 일직선으로 나란히 축조되었다. 널길의 벽은 3호분과 달리 바닥부터 13단까지 3횡 1수로 쌓아 올리고 그 위로는 갈수록 내만한다. 천장은 납작천장인 곳으로 길이 1m 이상의 큰 돌 1매를 덮어 놓았다.

널길에서 앞방으로 들어오는 입구의 무덤 앞으로 들어가는 문은 이중 아치형 구조이다. 널길 부분 바닥에는 배수로가 설치되었는데 벽돌을 사용하여 뒷방 남벽에서 시작하여 널문의 동벽을 따라 앞방을 지나 널길을 따라 설치되었다.

앞방은 평면이 대체로 방형인데 파손 정도가 심한 편이다. 4벽은 모두 바깥으로 배부른 구조이며 민무늬벽돌과 무늬벽돌을 무질서하게 섞어서 쌓은 상태였다. 벽돌 사이에는 회반죽을 발라서 견고하게 하였다. 앞방의 북벽에는 동쪽으로 약간 치우쳐 널길과 연결되는 묘문이 있다. 그리고 남벽의 중앙부에는 널방으로 통하는 널문이 설치된 구조이다.

널길과 연결되는 묘문의 양쪽 벽은 위로 올라가면서 안으로 기울어진다. 널문의 평면 형태는 3호분과는 달리 호선(弧線)이 아닌 일직선을 이룬다. 천장 구조는 도굴되고 무너져서 분명히 알 수는 없으나 벽면 곡선과 잔존 부분의 축조 방법으로 보아 궁륭형이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앞방의 서반부에는 2단으로 된 제단 시설이 있다. 위와 아랫단에 차이를 두었는데 추가장 등이 반영된 시간 차이의 시공이었을 가능성도 있다.

뒷방은 피장자가 안치되었던 곳이다. 앞방의 남쪽에 연결되는데, 앞방에 비하여 약간 동쪽으로 치우쳐 있다. 앞방보다 규모도 크며 벽의 곡만도도 크다. 바닥 평면은 중앙이 호선을 그리며 4벽면도 바깥쪽으로 호벽(弧壁)을 이룬다. 즉 배부른 벽면이라고 할 수 있다.

북벽 중앙부에는 앞방과 통하는 널문이 설치된 상태이다. 널문은 같은 종류의 벽돌로 폐쇄된 상태였다. 뒷방의 천장은 파손되어 내려앉았으나 벽면의 기울기 등으로 보았을 때 궁륭형 구조일 가능성이 높다.

뒷방 바닥에는 전면에 걸쳐 벽돌을 깔았다. 가장자리 벽돌들이 널방벽 아래로 물려 들어가는 것을 보면 바닥벽돌을 먼저 깔고 축조했음을 알 수 있다. 서벽을 제외한 모든 벽면에 붙여서 벽돌을 3겹으로 쌓아 관대를 만들었는데, 남벽 쪽의 관대를 가장 먼저 축조하고 잇대어 동벽 쪽의 관대를 축조한 것으로 보인다. 마지막으로 북벽에 붙여서 관대를 마련하였다. 적어도 2회의 추가장이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

곁방은 앞방의 동쪽에 만들었다. 4벽과 궁륭형 천장 부분이 잘 남아 있었다. 평면 형태는 동서로 약간 긴 방형이며 널방의 벽은 바깥으로 배가 부른 호벽이다.

5호분은 비록 도굴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제법 많은 유물이 출토되었다. 출토 유물은 토기류와 청동기류, 철기류로 구분된다. 토기는 석영혼입계의 백색토기 항아리와 시루를 얹힌 부뚜막이 대표적이다.

백색토기 항아리는 아가리 부분이 직립하는 형태로 겹아가리이다. 부뚜막은 점토띠쌓기로 성형한 네모진 형태로 화구와 연통이 일직선상에 설계되었다. 시루는 바닥에 둥글과 작은 증기 구멍이 뚫린 형태이다.

청동기로는 바닥 안쪽에 두 마리의 물고기가 새겨진 손잡이달린그릇이 대표적이며 청동거울 조각도 출토되었다. 거울은 기봉경(夔鳳鏡)인데 볼록거울의 형태이다. 후한의 늦은 시기와 서진 대에 유행한 거울 형식이다. 그리고 쇠낫과 쇠로 된 삽날끝이 출토되었다.

한편, 9호분에서는 널길 하부에서 봉토의 외부로 연결되어 있는 배수구 시설이 확인되었다. 이러한 양동리 전실묘(塼室墓)의 예는 평양 부근의 정백동 제227호, 장진리 제45호, 도제리 제50호 등이 있다. 이 중 정백동 제227호와 장진리 제45호에서 9호분과 같은 배수구 시설이 확인되었다.

의의 및 평가

양동리 5호분에서 출토된 유물 중 백색토기 항아리는 2세기 후반이 상한 연대이며 거울은 3세기 대에 유행한 형식이다. 철제의 삽날끝도 3세기 대의 기물이라는 연구 성과가 있다. 이 지역에 축조된 벽돌무덤의 연대를 가늠할 수 있는 기준을 제공한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봉산양동리고분군은 흔히 대방군 시기의 중요 고분군으로 이해된다. 특히 한나라 대의 정형화된 벽돌무덤이 비교적 온전하게 드러났기 때문에 서북한 지역의 이 시기 고분 문화를 이해하는 데 중요하다. 출토된 각종 유물들은 당시 중국에서 생산되거나 유행하던 기물의 수입품이거나 모방형이다. 무덤의 형식도 이와 비슷하기 때문에 피장자는 군현에서 활동한 인물일 가능성이 높다.

참고문헌

단행본

『鳳山 養洞里 塼室墓』(국립중앙박물관, 2001)
後藤守一 著, 『漢式鏡』(雄山閣, 1983)

논문

김재홍, 「낙랑지역의 봉산 양동리 5호 전실묘 출토 U자형쇠날」(『고고학지』 14, 한국고고미술연구소, 2005)
집필자
정인성(영남대학교 문화인류학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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