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천어은동유적'은 경상북도 영천시 금호읍에 있는 한경 · 방제경 등 각종 청동기가 출토된 원삼국시대 유적이다. 금호강 남쪽 기슭의 언덕 비탈면에 자리하며, 원삼국시대의 널무덤으로 추정된다. 1918년 토사가 붕괴된 자리에서 다량의 청동기가 발견되면서 알려졌다. 이 유적은 '대구평리동유적', '경주조양동유적' 등 영남 일대에서 발견되는 유적들과 맥을 같이하는데, 중국, 일본 등과 원거리 무역을 한 금호강 일대 대외 교류의 중심지로서 주목된다.
'영천어은동유적(永川漁隱洞遺蹟)'은 경상북도 영천시 금호읍 어은리에서 서남쪽으로 약 8㎞ 되는 지점인 금호강 남쪽 기슭의 언덕 비탈면에 자리한다. 금호강에 면한 부분은 절벽을 이루지만, 영천시와 경주시를 잇는 교통로를 한눈에 조망할 수 있는 입지이다.
일제강점기인 1918년에 폭우로 지면이 붕괴되면서 유물이 드러났다고 전해진다. 조선총독부는 1922년에 우메하라 스에지〔梅原末治〕와 고이즈미 아키오〔小泉顯夫〕, 후지타 료사쿠〔藤田亮策〕 등을 파견하여 유적을 조사하게 하였다.
조사자들은 유물이 출토된 위치를 정확히 파악하고 유구도 찾을 목적으로 현지를 찾았으나, 출토 지점을 확인하지 못하여 목적을 이루지 못하였다. 지금도 '문화유적분포지도'에 문화유산 산포 지역으로만 표시되는 이유이다. 다만, 발견 당시를 기억하는 현지인들의 증언과 출토 유물이 놓였던 상태 등을 고려하면 유구는 나무로 짠 관을 안치한 널무덤으로 추정된다.
출토 유물로는 청동기가 가장 많은데 한경(漢鏡) 3점, 방제경(倣製鏡) 12점, 동물형 허리띠 걸쇠[帶鉤] 2점, 소형 청동말, 사슴머리 장식과 청동단추 120여 점이 포함된다. 아울러 약간의 토기 조각과 석기 1점이 발견되었다. 다만, '영천어은동유적'의 당시 발견 경위를 고려할 때 공반유물(供伴遺物)들이 단일 유구의 것인지는 분명하지 않다.
금속기 유물들은 모두 지표 아래에서 밀집되어 발견되었으나, 토기 조각 등은 지표면에서 수집되었다. 일부 청동기에는 철 녹이 있어 철기와의 공반이 추정되었다. 채집된 유물들은 당초 여러 사람이 나누어 가졌다고 하며, 일부는 어린이들이 장난감으로 취급하였다고 알려진다. 이를 인근 주재소의 순경이 듣고 회수하여 보관해 두었으며, 일부는 황해도의 대방군 관련 유물과 섞인 채 전시되었다고 한다.
'영천어은동유적'에서 출토된 한경은 총 3점으로서 훼룡문경 1점과 이체자명대경 2점이다. 이체자명대경은 명문대에 ‘見日之光 天下大明’라는 글자가 주출되어 있다. 일반적으로 일광경으로 불리는 거울 형식이다. 이체자명대경은 전한(前漢) 대 후기에 유행하던 것이며, 훼룡문경은 후한(後漢) 대 초기의 형식이다. 모두 삼한시대에 해당한다. 최신 한경 연구를 참고해 보면 서기전 1세기 후반대와 1세기 후엽 경이라는 역연대가 얻어진다.
'영천어은동유적'은 단일 유구에서 가장 많은 방제경이 출토된 사례라고 할 수 있다. 대형 방사선연호문경 1점과 소형 방제경 11점이 출토되었기 때문이다. 일제강점기 우메하라 스에지는 소형 방제경의 주요 문양이 고사리무늬인 점에 착안하여 평양에서 출토된 한경과의 관련성을 지적하였다.
이들 소형 방제경들은 거의 흡사한 거푸집으로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것들이 총 7점 확인된다. 그리고 이와 흡사한 방제경은 ' 대구평리동유적'과 ‘포항성곡리유적’ 등과 일본 북부 규슈〔九州〕에서도 발견된다. 방제경의 생산지 문제가 대두되는 이유이다. 이들 방제경의 일부에는 포흔이 부착된 것으로 보아 여러 점의 거울을 직물에 감싸서 부장하는 습속이 있었던 듯하다.
'영천어은동유적'에서는 동경 외에도 동물 형상의 허리띠 걸쇠 즉, 대구(帶鉤)도 2점이나 출토되었다. 하나는 호랑이 모양이고 다른 하나는 말 모양의 것이다. 이들 호형대구(虎形帶鉤)와 마형대구(馬形帶鉤)는 주로 대구광역시와 경상북도 경산시를 동서로 흐르는 금호강변에서 출토되는 사례가 많다. 그중에서도 '영천어은동유적'에서 출토된 마형대구는 지금까지 발견된 자료 중에서 가장 사실적인 형태의 것으로 시기적으로도 앞서는 것으로 인정된다.
이것과 함께 소형의 말 모양 청동기도 출토되었는데 이 역시 금호강 유역권에서 출토 사례가 많다. 최근에는 경산 임당AⅠ-34호, 대구 신서동 10호, 경산 대동 57-1번지, 하양 양지리 1호에서 유사한 사례의 청동기가 발견되었다. 이들 중에서는 검파두식(劍把頭飾)의 매달리는 장식으로 사용된 사례도 있다.
'영천어은동유적'에서는 보고자가 한식토기(漢式土器)와 유사하다고 인식한 와질토기(瓦質土器) 조각과 민무늬토기로 추정되는 적갈색 토기 조각이 채집되었다. 후자는 금속기들과 같이 출토되었으나, 나머지는 인접한 주변에서 채집된 것이다. 한식토기로 인식된 토기들은 형태와 제도 기법으로 보건대 이들 금속기와는 다른 시기, 즉 후대의 유물일 가능성이 크다.
한편, 출토된 유물에는 석기 조각이 있는데 이는 의외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즉, 이 석기를 근거로 이 유구가 청동기에 더해 석기와 철기가 모두 동반되는 시대의 것이라는 인식을 주었기 때문이다. 일제강점기의 관학자(官學者)들은 이를 금석병용기(金石倂用期)의 대표적인 유구라고 판단했으며 이는 일본 열도의 야요이시대와 통한다고 보았다.
'영천어은동유적'과 함께 이후 ' 월성입실리유적', ‘김해패총’ 등이 연이어 발견되면서 금석병용기라는 시대와 대표 유물들의 인식이 마련되었다. 세계사적으로 금석병용기란 석기와 순동이 동반되는 청동기시대 초기를 일컫는 시대명이었으나, 일본 관학자들은 이를 한반도 철기시대의 전야를 설명하는 시대명으로 바꾸어 놓았다.
광복 후 금석병용기는 청동기시대와 초기 철기시대, 그리고 원삼국시대로 분화되었다. 한반도를 금석병용기라고 주장한 것은 석기시대에 머물러 있던 한반도가 청동기시대를 거치지 않은 채 철기와 청동기는 물론 여전히 석기를 사용하는 시대로 곧장 전환한다는 ’정체론’적인 시각이 만들어 낸 시대 구분명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그러한 변동이 일본 열도와 동일하다는 ‘동역론’적인 설명 틀에 바탕한 이해라고 할 수 있다.
‘영천어은동유적’ 등에서 비롯된 금석병용기론은 광복 후 비파형동검(琵琶形銅劍) 등으로 대표되는 청동기시대가 설정되면서 시대 구분명으로서는 자리를 잃게 되었다.
호형 · 마형 띠고리와 사슴머리 · 작은말 조각품 및 동제 단추의 문양 등은 오르도스(Ordos) 등 소위 북방계 청동 유물과도 깊은 관련을 지니고 있는 것으로 믿어져 우리나라 청동기 문화의 계통이 단순하지 않음을 보여 준다.
또한, 여기에서 나온 방제경의 동범경은 일본 사가현〔佐賀縣〕 및 오이타현〔大分縣〕의 야요이시대 유적에서도 발견된 것이다. 당시 일본으로의 직접적인 문화 전파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는 '영천어은동유적'이 영천 일대에서 대외 교류를 통해 성장한 세력으로 판단되는 근거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