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나라가 신라와 당나라의 연합군에 의하여 멸망한 백제 땅에 웅진도독부(熊津都督府)를 설치하여 이 지역을 직접 지배하는 과정에서, 허수아비 정권인 백제를 내세워 신라에게 백제와 화친하도록 강요하여 이루어진 동맹이다.
7세기 초 당나라가 성립하면서 신라와 당나라는 서로 접근하였다. 고구려를 패망시키려는 당나라와 백제를 통합하려는 신라의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졌기 때문이다.
648년(진덕여왕 2)신라의 김춘추(金春秋: 뒤의 태종무열왕)가 당나라로 가서 당 태종과 외교적 담판을 맺었다. 즉, 양국이 백제와 고구려를 멸망시키면 백제 전지역과 평양 이남의 고구려 땅은 신라에게 할양하기로 하는 일종의 영토분할을 약정하였다.
그 뒤 660년 나당연합군이 백제를 정벌하였으나 당나라는 모든 전리를 독점, 포로 1만 2,000명을 당나라 본토로 압송하는 동시에 당병 1만 명을 유인원(劉仁願)에게 주어 백제 땅에 주둔시키고 웅진도독부를 설치하여 직접 백제지역을 지배하려 하였다. 그 해 최초의 웅진도독에 왕문도(王文度)가 임명되었으나 부임하자마자 곧 병으로 죽었다.
한편, 백제부흥군이 계속 맹위를 떨쳐 유인원과 그 군대를 포위하자 663년당나라는 유인궤(劉仁軌)를 보내어 유인원을 돕게 하였다. 물론 신라군도 이들을 지원했다.
다시 증원 요청이 있자 당나라는 우위위장군 손인사(孫仁師)에게 40만 명의 군사를 주어 파견하는 동시에 당나라 본토에 억류하고 있던 백제 의자왕의 왕자 부여 융을 웅진도독으로 임명하여 외교관 두상(杜爽) 등과 함께 건너가게 했다.
두상은 신라 정부에 압력을 가하여 부여 융과의 회맹을 강요하였다. 신라는 백제 잔적을 다 진압하지 못하였다는 이유로 회맹을 거절하였으나 이들이 진압되면서 회맹도 진척되었다.
664년 2월 신라측의 김인문(金仁問) · 김천존(金天存)이 웅진에서 부여 융을 만나 유인원의 참여 속에 회맹하였다. 그러나 이는 회맹에 앞선 예비회담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 뒤 665년 8월취리산에서 유인원이 입회한 가운데 신라측의 문무왕 및 여러 대신과 백제측의 웅진도독 부여 융 사이에 회맹이 이루어졌다.
회맹은 중국 고대의 방식을 따라 이곳에 단(壇)을 쌓고 백마를 죽여 하늘과 땅의 신 및 산천의 신에게 제사한 후 그 피를 회맹인들의 입에 발라 맹세하게 함으로써 이루어졌다. 맹세하는 글(盟文)은 유인궤가 지었는데, 내용은 신라와 백제가 영원한 우방으로서 형제처럼 화친하겠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백제를 통합하는 데 실패한 신라의 불만을 두려워 한 부여 융은 오래지 않아 당으로 돌아갔다. 이후 668년 나당연합군이 고구려를 멸망시키자, 신라는 그 동안 치른 전쟁의 대가를 찾고자 대당 전쟁을 수행하였다.
670년부터 당병을 격파하기 시작하여 671년에는 백제 전지역을 점령하고 새로 밀려오는 당병을 분쇄했으며, 676년에는 결국 전쟁을 승리로 끝맺었다. 이와 함께 취리산회맹도 해소되었다.
한편, 취리산의 위치에 대해서는 지금의 충청남도 공주시 우성면의 연미산(鳶尾山)에 비정하는 설과 대전광역시 동구와 대덕구에 걸쳐 있는 질〔迭峴〕에 비정하는 설의 두 가지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