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근거는 『구당서』 백제전에 두고 있다. 기록에 의하면 다음과 같다.
642년백제의자왕이 군사를 일으켜 신라의 40여 성을 쳐서 군대로 지키면서 고구려와 화친통호(和親通好)하고, 신라의 당항성(黨項城)을 취하여 신라가 당나라와 교섭하는 길을 막으려고 하자 신라가 사신을 당에 보내어 급히 구원을 청하였다고 한다.
이러한 중국측의 기록은 『삼국사기』에서도 그대로 적용되었다. 신채호(申采浩)는 이색적인 자료를 인용하여 여제동맹을 강조하였다.
즉, 고구려연개소문(淵蓋蘇文)이 백제의자왕에게 사절을 보내어, “백제가 신라와 싸우면 고구려는 당나라를 쳐서 신라를 구원하지 못하게 하고, 고구려가 당나라와 싸우면든 백제는 신라를 쳐서 신라가 당을 응하지 못하게 하자.”는 교환조건으로 여제동맹을 맺었다는 것이다.
이 여제동맹은 백제가 패망한 660년까지 지속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자료의 인용서를 밝히지 않아 출처를 알 수 없다.
이 무렵은 신라가 당과 밀착하여 나당 군사동맹을 맺으려고 노력한 때였다. 신라는 고구려와 백제의 공격을 받았지만, 특히 백제에게 40여 성이 함락되어 커다란 위기에 처해 있었다. 이런 시기에 신라는 당나라에 원조를 청하는 외교 문서에서, 고구려와 백제가 동맹(화천통호)하고 있다고 주장한 것이다.
한편 642년 8월에는 백제군이 대야성(大耶城 : 지금의 합천)을 함락시키고 김춘추(金春秋 : 후일의 태종무열왕)의 사위 품석(品釋)부부가 전사하였기 때문에 김춘추는 곧 고구려로 가서 청병 외교를 하였으나 실패하였다. 실제로 여제동맹이 맺어져 있었다면 신라는 고구려에 청병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중국측 『구당서』·『신당서』와 『삼국사기』에 나오는 여제동맹에 대한 기록을 비교·검토해 보면, 실제로 여제동맹을 체결하였다는 기록은 하나도 없고, 그 기록의 전부가 신라의 대당 외교 문서의 요약 속에서 발견될 뿐이며 단지 신채호의 주장이 있을 뿐이다. 그래서 여제동맹설에 대하여는 다음과 같이 추단한다.
① 당시 당의 적수는 고구려이고 신라의 통합 대상은 일차적으로 백제였으므로 신라는 대당 외교 문서에서 항상 고구려와 백제가 신라를 침범한다고 강조하였다.
② 이것을 중국에서 『구당서』·『신당서』를 편찬할 때, 고구려와 백제가 동맹하였다고 명기하였을 뿐 아니라 실제로 당에서는 고구려와 백제가 동맹한 것으로 믿었을 가능성이 있다.
③ 『삼국사기』를 편찬할 때 중국측 기록을 옮겨 실으면서 여제동맹설은 더욱 굳어졌다고 본다.
여제동맹설의 근거는 신라의 대당 외교 문서인 바, 신라는 국제 정세를 생각하여 고구려와 백제가 동맹한 것처럼 조작함으로써 나당 군사동맹을 실현시킨 것인데, 이와 같이 여제동맹은 신라의 국제적 음모에 따른 허구적 산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