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벌포전투 ()

고대사
사건
676년(문무왕 16) 11월에 기벌포(伎伐浦)에서 신라의 해군이 당나라 해군을 크게 깨뜨린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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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요약

기벌포전투는 676년(문무왕 16) 11월에 기벌포에서 신라의 수군이 당나라 수군을 크게 깨뜨린 전투이다. 기벌포는 서해 재해권이 걸린 요충지로 다양한 설이 있으나 그 위치를 금강 하구로 보고 있다. 이 전투는 백제·고구려를 멸망시킨 신라, 당나라의 군사동맹 이후 당나라가 신라를 배신하여 일어난 대당전쟁의 일환이었다. 매소성 전투에서 패배한 당나라는 기벌포를 공격하였고 22번의 전투 끝에 신라는 당나라 수군 4천여 명을 죽이고 승리하였다. 신라가 대당전쟁을 승리할 수 있는 결정적 계기이자 서해상의 재해권을 완전히 장악하는 계기가 되었다.

정의
676년(문무왕 16) 11월에 기벌포(伎伐浦)에서 신라의 해군이 당나라 해군을 크게 깨뜨린 전투.
역사적 배경

기벌포의 위치에 대해서는 약간의 이설이 있으나, 일반적으로 백강(白江)은 곧 지금의 금강이고, 금강의 하구가 곧 기벌포라고 알려져 있다.

고구려 · 신라 · 백제가 서로 자국의 발전을 노려 싸우던 중 553년에 신라 · 백제 공수동맹(攻守同盟)이 와해되어 더욱 상호항쟁이 격화되었다. 이에 648년에 신라는 당나라와 군사동맹을 맺었다. 그리하여 신라와 당나라 군대는 660년에 기벌포에서 연합해 백제의 사비성(泗沘城)을 함락시켜 백제를 멸망시켰고, 다시 668년에는 신라와 당나라 군대가 평양 근처에서 연합하여 고구려를 멸망시켰다.

그러나 당나라는 백제와 고구려 지역을 직접 지배하고 신라까지 복속시키려 하면서 신라의 자주성을 빼앗았다. 동시에, 고구려의 평양 이남과 백제 땅을 신라에 주기로 약속한 영토분할 약정을 위배하였다. 이에 격분한 신라는 당나라에 선전포고를 하고 대당전쟁(對唐戰爭)을 감행하였다.

경과 / 결과

신라의 대당전쟁은 670년부터 676년까지 7년간 지속되었다. 신라는 북쪽 경계로 남하하는 당나라 군대를 맞아 675년 천성(泉城)매소성(買肖城)에서 크게 이겼다.

이에 당은 육로로 신라의 한강 방어선을 돌파하는 것은 어렵다고 판단하고 676년 11월 금강 하구 기벌포에 설인귀(薛仁貴)가 지휘하는 당 함대를 침입시켜 신라의 측면을 공격하였다. 기벌포는 백제의 수도인 부여 방어를 위해 중시되던 지역이다. 이곳은 강의 하구라기보다 바다의 만(灣)이라 표현할 수 있을 정도로 넓은 지역으로 기벌포를 장악하면 서해를 남북으로 양분할 수 있었기 때문에 서해의 제해권과 관련해서도 아주 중요한 군사 요충지였다.

앞서 신라는 673년에 함선 1백 척과 해군을 서해에 배치시켜 방비하고 있었다. 676년 설인귀의 당나라 해군이 기벌포로 내려오자, 사찬(沙飡) 시득(施得)이 함선을 이끌고 기벌포에서 설인귀군과 싸웠으나 패배하였다. 그러나 크고 작은 전투 22번에 걸쳐 결국 당나라의 수군 4천여 명의 목을 베고 승리하였다. 기벌포 전투에서 당나라의 해군을 격파함으로써 신라가 승리할 수 있는 결정적 계기를 얻게 되었다. 이 싸움은 대당전쟁을 승리로 끝맺은 마지막 회전이었다.

의의와 평가

기벌포 전투에서 당의 패배를 두고 이 무렵 당을 둘러싼 새로운 군사적 국면과 관련시키기도 한다. 나당전쟁은 675년 9월 매소성전투를 고비로 당군의 패색이 짙어졌으며, 676년 2월 안동도호부(安東都護府)를 평양에서 요동으로 옮긴다. 676년 윤3월 토번(吐蕃)이 당을 공격하자 당은 군사전략을 토번 중심으로 전환시켰다. 당 조정은 토번과의 전쟁에 주력하기 위해 신라와의 전쟁에서 철수하는 방책을 취하였다고 보는 것이다.

그해 11월 기벌포 전투 당시 당은 상당수의 병력과 유이민들을 이송하기 위해 기벌포로 집결한 상태로 신라와 전투하였으며, 당은 방어적 태세로 대규모 접전을 회피하여 병선 보전에 주력하였던 것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해전의 성격을 고려할 때 22차례의 싸움이 있었다는 기벌포 전투는 최초 접전은 대규모 해전이었으나, 그 외는 양측 주력군의 회전(會戰)이 아니라 고립되어 있다가 퇴각을 기도하는 당군을 추격하여 소탕하는 성격의 전투로 보기도 한다.

기벌포 전투 이후 서해상에서 당군의 어떠한 군사활동도 감지되지 않는 점으로 보아 신라 수군이 서해의 제해권을 완전히 장악하는 계기가 되었던 것으로 판단된다. 또한 당 수군이 이미 대양(大洋) 함대를 구성한 반면 신라수군은 연안(沿岸) 함대에 머물고 있었던 점을 감안해보면, 최초 접전에서 패배한 후 전술을 전환하여 유연하게 대처한 점은 신라 수군의 쾌거라 할 수 있다.

참고문헌

『삼국사기(三國史記)』
「나당전쟁기 기벌포 전투와 설인귀」(이상훈, 『대구사학』90, 2008)
「白江及び炭峴について」(池內宏, 『滿鮮史硏究』上世2, 吉川弘文館, 1979)
「百濟戰役地理考」(津田左右吉, 『津田左右吉全集』11, 岩波書店, 1964)
「唐羅交戰地理考」(津田左右吉, 『津田左右吉全集』, 岩波書店, 19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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