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의 5소경(小京) 가운데 하나로 경상남도 김해 지역에 설치되었던 지방통치거점이다.
금관경은 옛 가야지역에 해당하는 경남지역을 효과적으로 통제하기 위해 설치된 것으로 보인다. 신라의 5소경(小京) 가운데 하나로 경상남도 김해 지역에 설치되었던 금관경은 북원, 서원, 중원, 남원 등 다른 소경들과 달리 방위명(방향)을 칭하지 않는 것이 특징이다. 신라의 5소경 제도가 백제의 5방 제도를 참고한 것으로 본 견해가 있지만 금관경 지명을 고려하면 근거가 부족하다.
이 지역은 통일신라의 주요 교통로였던 염지통, 동해통, 해남통, 북악통, 북해통 등 오통(五通) 가운데 동해통과 관련 있을 것으로 보이는데, 경주를 기점으로 동해안을 따라 남쪽 울산과 부산 방면으로 이어지는 교통로 상에 위치하기 때문이다. 특히 김해지역은 고대국가 발전에 중요한 요소였던 철의 생산이 풍부하던 곳이다. 김해 대성동 고분에서 출토되는 철제무기류, 마구류, 갑옷류 등은 그러한 모습을 보여준다.
금관경의 크기는 군(郡) 정도였을 것으로 보인다. 주변에 위치한 동래군(東萊郡, 부산 동래), 밀성군(密城郡, 밀양), 의안군(義安郡, 경남 함안 및 창원)의 위치와 영역을 고려하면 금관경을 둘러싸고 있는 형국으로 그 가운데 놓인 금관경은 면적에서 이들 군과 큰 차이가 없는 것으로 파악된다.
본래 금관경은 법흥왕대 금관가야가 신라에 투항하면서 확보한 지역이었기에 지배자였던 구해왕(仇亥王)에게 식읍으로 지급하여 일정기간 간접지배를 시행했던 곳이다. 그렇기에 삼국통일의 일등 공신이었던 김유신이 속한 가야계 신김씨(新金氏) 세력에게는 근거지로서 상징성을 지니고 있었다. 따라서 금관경의 설치와 운영은 금관가야 왕족의 후손들에 대한 특별한 배려였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신라하대 진골귀족의 포화상태로 인해 관직인플레이션이 발생하고 정치적으로 도태되는 현상이 나타나면서 가야계 신김씨 역시 그 흐름에서 예외일 수는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나말려초에 지방에서 흥기하여 사회변동을 이끌었던 지방세력 가운데 신김씨 세력도 포함되기 때문이다. 금관경이 위치했던 김해지역을 근거지로 활동한 김인광(金仁匡)이 대표적이라 할 수 있다.
치소와 관련해서는 김해 시가지 중심에 위치한 분산성(盆山城)을 주목한 견해가 있었으나 1999년부터 2011년까지 4차례 실시된 조사결과 초축 시기가 삼국시대 말에서 통일신라시대 초로 밝혀져 중심지보다는 배후산성으로 활용되었을 가능성이 높은 편이다. 조선 전기 축성된 김해읍성을 둘러싸고 있는 김해고읍성이 고대 시가지구획 추정범위와 겹치고 있어 가능성이 엿보인다.
김수로왕(金首露王)이 금관가야(가락국)를 건국한 이래 가야연맹의 중심국가로 존재해 왔으나, 삼국항쟁기에 국력이 점차 쇠퇴하여 532년(법흥왕 19) 제10대 구해왕(九垓王)이 신라에 투항함으로서 멸망하였다. 그 영토는 신라에 편입되어 금관군( 가야군)이 되었으며, 680년(문무왕 20) 금관소경(金官小京)으로, 757년(경덕왕 16) 김해경(金海京)으로 개칭되었다.
통일신라의 지방통치조직으로 지방에 대한 통제력을 강화하고 수도의 편재성을 보완하려고 했던 신라중앙정부의 집권력 강화의지를 보여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