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견(崔堅)은 927년(견훤 27) 거란의 사신 사고(裟姑), 마돌(麻咄) 등 35명이 예물을 갖고 후백제로 왔다. 견훤은 이들 사신을 거란까지 호송해 주기 위해서 장군 최견에게 사신 마돌 등을 호송하게 하였다. 후백제와 거란 사이에 모종의 군사 합의가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그런데 거란으로 돌아가기 위해 북쪽으로 항해하던 중 예상치 못한 바람을 만나 후당(後唐)의 등주(登州)에 표착하게 되었다. 후백제가 중국 남쪽의 오월과 북쪽의 후당과 외교 관계를 맺고 있었지만, 후당의 입장에서는 거란과 적대적이었고 후백제의 장군 최견까지 포함된 것을 알고 위기 위식을 느꼈던 것 같다. 결국, 거란 사신들과 최견은 모두 살해되었고, 후백제와 거란의 군사 합의도 실행되지 못하였다.
새로 세력을 키워 가던 거란은 925년 또는 926년 발해를 멸망시켰다. 고려 왕건은 발해를 멸망시킨 거란에 적대적이었다. 거란은 서쪽에 후당과 동쪽의 고려 양쪽에 적대적인 국가를 두게 되었다. 거란은 고려와 대립하고 있던 후백제와 연결하여 고려를 견제하고자 927년 후백제에 사신과 예물을 보낸 것으로 추정된다.
후백제 견훤은 927년 신라 경주로 쳐들어가 경애왕을 죽이고 경순왕을 왕위에 앉혔다. 후백제 견훤과 고려 왕건의 대립은 더욱 격화되었다. 후백제의 입장에서도 북방의 새로운 강자 거란과 연합하여 고려를 북쪽과 남쪽에서 동시에 압박할 필요성을 느끼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