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백제의 왕 견훤(甄萱)은 935년 아들 신검에 의해 왕위에서 쫒겨나 금산사에 유폐되었다가, 936년 고려 왕건에게 귀화하였다. 936년 9월 신검과 왕건의 마지막 전투는 일리천에서 벌어졌다. 견훤이 고려군의 앞에 서자 후백제군의 사기는 땅에 떨어졌다.
패퇴한 신검은 충청도 황산 탄현까지 후퇴하였으나 결국 왕건에게 항복하였다. 그런데 왕건은 견훤의 뜻과 달리 신검을 살려 주었다. 견훤은 이것을 분하게 여겨 등창이 나서 며칠 만에 황산(黃山)의 불당에서 죽었다고 한다. 이때가 936년 9월 8일이었고 나이는 70세였다.
황산의 불사(佛舍)에서 죽은 견훤은 인근 지역에 묻힌 것으로 추정된다. 견훤이 죽은 절을 논산 개태사로 보기도 한다. 『 제왕운기』에 의하면 견훤이 사망하자 왕건이 부의를 넉넉히 해 주었다고 한다. 견훤이 묻힌 곳은 확실하지 않다.
『 고려사』, 『 세종실록지리지』 등의 자료에 의하면 견훤묘는 은진현의 남쪽 12리 풍계촌에 있었다고 한다. 현재 견훤묘는 충청남도 논산시 연무읍 금곡리 산18-3 야산에 자리하고 있다. 금곡리가 예전에 은진현에 소속되어 있었으므로, 이곳을 『세종실록지리지』 등에서 말한 견훤묘로 보고 있다.
『 여지도서』에 의하면, 견훤이 작치(鵲峙) 고개에 진을 쳤는데 까치가 깃대 위에 앉자 깃대가 무너졌다. 이를 본 견훤이 패할 줄을 알고 “내가 죽으면 모악산(母岳山)이 보이는 곳에 장사 지내라.”라고 하였다는 고사를 인용하고 있다.
견훤이 유언을 남겼다면 자신이 나라를 세운 전주나 광주 또는 자신이 태어난 상주에다 묻어 달라고 하기보다, 나라를 세웠지만 결국 나라를 망하게 한 회한을 품고 자신이 죽은 황산의 불사 근처에 묻어 달라고 했을 가능성이 높다고 보기도 한다.
견훤묘는 10세기경에 축조한, 지름 10m, 높이 5m, 둘레 83m의 봉분이다. 1981년 12월 21일 충청남도 기념물로 지정되었다. 묘 앞에는 1970년 견씨(甄氏) 문중에서 건립한 묘비가 있으며, ‘후백제왕견훤릉(後百濟王甄萱陵)’이라고 새겨져 있다.